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Aug 12. 2022

<그레이 맨> 리뷰

단가로 승부하는 공장


<그레이 맨>

(The Gray Man)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연출한 뒤 크리스 헴스워스와 <익스트랙션>, 톰 홀랜드와 <체리> 등 마블 배우들의 액션 혼을 유지하고 있는 루소 형제의 신작, <그레이 맨>입니다. 라이언 고슬링을 주연으로 크리스 에반스, 아나 데 아르마스, 제시카 헨윅, 레게 장 페이지, 빌리 밥 손튼 등이 이름을 올렸죠. 7월 13일 극장 개봉, 7월 22일 넷플릭스 공개된 작품입니다.



 그 누구도 실체를 몰라 '그레이 맨'으로 불리는 CIA의 암살 전문 요원, 시에라 식스. 시에라는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형량을 줄여 준다며 영입해 온갖 임무와 작전을 수행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식스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우연히 CIA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알게 되고,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았다고 판단한 CIA가 보낸 또 다른 암살자와 맞서게 됩니다.


 상업용 첩보 영화의 아주 전형적인 줄거리입니다. 인간 병기인 주인공은 조직에서 존재 자체부터 유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출신도 소재도 불명확해 언제 어디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든 꼬리 잘라내기엔 안성맞춤이죠. 어떤 일을 맡겨도 인상 한두 번 찡그리면서 해결해 버리고 마는 추진력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생활을 청산하리라는 막연하고도 인간적인 감정도 남아 있습니다.



 신뢰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마침내 누군가 그의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합니다. 평소 믿고 있었던 직속 상사일 수도, 새로 들어와 주인공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신참일 수도 있죠. 어찌됐건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지만, 주인공은 몇 번이고 스스로의 명성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와중 진짜 우정이나 사랑을 찾는 것은 덤이겠구요.


 <그레이 맨>도 이 공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제이슨 본, 이단 헌트, 제임스 본드 등 수많은 업계 동료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가죠. 몇 번이고 재생산되는 플롯임에도 꾸준한 볼거리를 제공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제작비로 2억 달러를 들이며 넷플릭스 영화로는 <레드 노티스>와 함께 공동 1위의 규모를 자랑하는데, 그만큼 안정적인 투자처였다는 뜻이겠지요.



 <그레이 맨>의 강점은 주연과 액션에 있습니다. <드라이브>나 <블레이드 러너 2049> 등으로 고독한 늑대 스타일의 원톱 주인공 역을 소화해 왔던 라이언 고슬링은 이번에도 말수와 능력이 반비례하는 시에라 식스를 꽤 훌륭하게 소화합니다. 언제 어떤 위기를 맞이해도 어떻게든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아내는데, 무지막지한 맷집이나 괴력보다는 약간의 재치와 임기응변이 섞여 보는 맛이 있죠.


 그의 대립각엔 크리스 에반스의 로이드 핸슨이 있습니다. 바른생활 사나이 그 자체였던 캡틴 아메리카 역이 정말 질렸는지, 능청스러움과 잔악무도함으로 무장한 사이코패스 킬러를 양껏 연기하죠. 최근 사이코패스 악당이라고 하면 눈이나 크게 뜨고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말만 뱉어내는 양산형(?)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많아졌는데, 이 쪽은 그래도 그 선을 알고는 있는 느낌입니다.



 맨몸 액션은 절제되어 있지만 날카롭습니다. 지금도 마블 스튜디오 최고의 액션으로 회자되곤 하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때의 느낌이 물씬 나죠. 불이 붙어 붉은 연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조명탄을 쥐고 싸우거나, 한밤중에 켜져 있는 손전등을 들고 싸우는 등 미묘한 차이점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딱히 필요는 없지만 보기에 멋있다는 것이죠.


 2억 달러씩이나 되는 제작비를 전혀 아끼지 않은 듯한 거대자본 액션도 물론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싸우다가 옆구리를 터뜨려 추락시키거나 도심에서 싸우다가 건물을 통째로 폭파하고 트램을 전복시키죠. 오히려 이런 커다란 액션들로 장식된 초중반부에 비하면 식스와 로이드의 1대 1 대결로 마무리되는 최후반부가 초라해 보이는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애석하게도 그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대부분 업계 표준 이하입니다. 동료라고 하기엔 2% 정도 부족한 아나 데 아르마스의 대니 정도가 평균이라면, 피츠로이의 조카나 목걸이에 들어 있는 드라이브는 너무나도 전형적이라 말하면 입 아픈 인물과 장치들뿐이죠. 제시카 헨윅의 수잔 브루어처럼 궁금하지도 않은데 자꾸 나와서 없는 존재감을 어필하는 캐릭터는 당연히 마이너스가 되겠구요.


 식스와 비슷한 동료는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긴장이 있지만, 이런 영화에 아이의 존재는 불사의 치트키나 다름없습니다. 주인공의 딸, 혹은 평생 딸처럼 여겨 온 아이여도 참작이 어려운 마당에 웬 직장 상사의 조카를 내세우니 그 험한 현장 생활은 어떻게 해 왔나 싶습니다. 주인공은 선해야 하니 그렇다 치지만서도 굳이 나서서 개성을 없애야 하나 싶은 아쉬움도 크죠.



 줄거리만 따져 보면 지금도 일 년에 몇 편씩 나오는 리암 니슨 영화들과 종잇장 차이지만, 과정의 작은 차이가 결과의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는 좋은 예시가 될 수도 있겠네요. 일정한 수익을 내야 하는 극장용 영화로 기획되었다면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었겠지만, 벌써 속편에 스핀오프까지 기획되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어디까지 가려는지 궁금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헌트>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