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Oct 29. 2022

<베터 콜 사울> 리뷰

피해갈 수 없는 천칭


<베터 콜 사울>

(Better Call Saul)

★★★★


 2015년 2월 방영을 시작해 지난 8월 시즌 6 13화로 완결을 맞이한 <베터 콜 사울>입니다. 미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를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브레이킹 배드> 시리즈의 외전으로, 극중 등장했던 변호사 사울 굿맨을 주인공으로 두고 있죠. 한 시즌에 10편씩, 마지막 시즌은 예외적으로 13편까지 나와 총 63부작으로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명망 있는 로펌 대표인 형 아래에서 철부지 탕아로 자란 제임스 맥길. 동네를 쏘다니며 애먼 사람들 등쳐먹던 지미였지만,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변호사 자격증을 따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나 싶던 찰나, 변호사만 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계획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그 자신의 손에 조금씩 금이 가게 되죠.


 1화를 보려면 다섯 시즌짜리 드라마를 먼저 보고 봐야 하는 여섯 시즌짜리 드라마라니, 웬만한 인기가 아니라면 전제조차 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브레이킹 배드>는 고등학교 화학 교사가 엇나간 제자와 손잡고 구역의 마약왕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다루었고, 거기서 주인공 일행이 궁지에 몰렸을 때 찾았던 속물 중의 속물 변호사가 바로 사울 굿맨이었죠.



 <베터 콜 사울>은 돈이면 못 할 일이 없어 보였던 속물 변호사가 도대체 어떤 사연과 기승전결을 거쳐 그 곳에 도달했는지 다루는 시리즈입니다. 당연히 날 때부터, 변호사 시험을 치는 그 순간부터 돈에 미친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었던 지미 맥길이 좀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절치부심하여 일생일대의 인간승리를 이룩한 순간이 바로 변호사 시험이었으니까요.


 같은 동네에 살아도, 심지어는 바로 이웃집에 살아도 이상하지 않을 평범한 사람들이 이쪽 세계에 물들어 변해 가는 과정을 다루었다는 면에서는 본가인 <브레이킹 배드>와 흐름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브레이킹 배드> 쪽은 그래도 멀쩡한 직업과 가정을 이루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약의 뒷세계에 빠져들어 저항하다가 물들어 가는 과정이라면, <베터 콜 사울>은 그보다 더 느린 호흡으로 사울에게 집중합니다.



 사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위 말하는 백수 건달이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듣고 있으면 사람 홀려 넘어가게 하는 화려한 언변뿐이었죠. 직업도 목표 의식도 없이 껄렁한 친구들과 붙어 다니며 그 잘난 혓바닥으로 소소한 사기나 치는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비틀거릴지언정 악인은 아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알아본 친형과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사울을 소중히 여겼죠.


 하루 벌어 하루 즐겁게 사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울에게도 문득 자신을 뒤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자신을 소중히 대해 주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심하죠. 마침 형이 대형 로펌을 맨땅에서 일군 법조계의 전설이었던 바, 업계에서는 쳐 주지도 않을 경력으로 어떻게 어떻게 변호사 자격증을 따는 데 성공합니다.



 이제 뭐가 됐든 국가에서 인정하는 변호사가 되긴 되었으나, 인맥도 실력도 증명되지 않은 그를 써 줄 사람은 만무합니다. 로펌은 꿈도 꿀 수 없구요. 그나마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형과 형의 지인들이 법조계 핵심에 얼굴은 비출 수 있게 해 주지만, 사울 스스로도 이왕 자립해 보겠다고 한 것이니 그런 도움까지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손으로 해냈음을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었으니까요.


 가진 것은 화려한 언변과 사기꾼 전력(?)이니 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평소 눈여겨보았던 동네 귀부인이 있는데, 운전이 좀 험한 것 같으니 스케이드보드를 타고 다니는 동네 멍청이 둘을 포섭하죠. 보드를 타다가 그 할머니 차에 치인 척 연기를 열심히 해 주면 합의금을 두둑히 받아 나눠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야심차다면 야심찬 첫 프로젝트였지만, 시작부터 뒷세계의 야수를 건드리고 말죠.



 이처럼 <베터 콜 사울>은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울의 행보를 따라갑니다. 그의 가장 큰 동력은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힘이죠. 지금껏 남들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이제 자신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믿지 못하리라 여겼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일의 연속이죠. 목숨이 오가는 것도 일상입니다.


 이 때 사울에겐 남들이 보이지 않는 길이 보입니다.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의 혓바닥과 행동력 덕분이죠. 법이라는 규칙에 의거해 판결을 받아내기만 하면 그 결과는 누구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증거와 증인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의 심리와 기억을 뒤섞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란 사울이 지금까지 누구보다 잘 해 왔다고 자신하는 영역이었습니다.



 누구나 사울에게 자신의 일부를 이입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이루려 노력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정말 정직한 방법으로 순수하게 노력하여 도달했던 경험도, 그 과정에서 약간의 지름길이나 편법을 택해 더 쉬운 방법으로 도달했던 경험도 있죠. 후자를 맛본 이상 전자로 돌아가기란 여간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악인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전자로 돌아가고자 하는 관성 또한 모두에게 남아 있죠.


 그러면서도 그 달콤한 유혹을 버리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옆길로 한 발짝만 가면 최소한 자신이 보기엔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몇 배는 쉽게 얻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몇 번은 성공합니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려 할 때마다 지미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다친 사람도 없이 억울한 사람을 수렁에서 꺼내 주었는데, 오히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자신의 업적을 치켜세우죠.



 그러나 그러다가 딱 한 번 어긋나는 순간 모든 것이 틀어집니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그것도 너무 큰 결과를 불러옵니다. 다 지나간 뒤에 후회해 봤자 남는 것은 회한뿐이지만, 여기서도 선택은 내릴 수 있습니다. 죄책감에 잠식당하거나, 의도는 옳았다며 아무렇지 않은 듯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죠.


 지금은 종영한 KBS의 스테디셀러였던 <다큐멘터리 3일>에 나왔던 명언이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굽은 길 투성이지만, 타고 갈 때엔 직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베터 콜 사울>이 보여주는 사울의 여정 또한 그렇습니다. 앞으로 갈 땐 이유가 있고 구실이 있지만, 어느 날 서서 돌아본 길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과 방향으로 이리저리 뻗어 있죠.



 굳이 <브레이킹 배드>의 외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오락적인 측면에서는 법정 드라마와 케이퍼 무비(도둑질 영화)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고, 드라마적인 측면에서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개인적 갈등과 성장을 듬뿍 갖고 있죠. 특히 형인 찰스 맥길과의 관계는 지미의 커리어는 물론 지미 그 자체를 설명하고 수식하는 커다란 줄기가 됩니다.


 때문에 오히려 <브레이킹 배드>와의 연결점들을 얼핏얼핏, 아는 사람만 보이게 드러냈던 초반 시즌의 집중력이 더 나은 편입니다. 지미 맥길이었던 시절은 마치 지미의 눈으로 세상과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며 지미의 감정선과 기억을 1인칭 시점으로 공유하는 브이로그처럼 보였던 반면, 사울 굿맨이 된 후반부 시즌들에서는 악당 변호사의 모험을 옆에서 바라보는 창작물처럼 느껴지죠.



 물론 반대로 보면 초반부 시즌은 고조되며 향하는 지향점이 없었지만, 후반부 시즌은 로스 포요스 에르마노스가 등장하고 살라만카 집안과의 대립이 구체화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아군과 적군의 대립이 흥미 포인트가 되었죠. 점점 <베터 콜 사울>에서 <브레이킹 배드>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달까요. 지미는 주연이었지만 사울은 조연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피노키오>에 지미니 크리켓이 있었다면 <베터 콜 사울>엔 킴 웩슬러가 있습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지미의 입장에 공감까지는 할 수 없겠다는 사람들은 킴을 택할 수 있죠. 밑바닥부터 함께 출발해 어느 고난과 역경까지도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함께했음에도 결국 마음 속에 남은 일말의 인간성 탓에 지미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기승전결뿐만 아니라 종착지와 지향점 또한 <브레이킹 배드>와 궤를 같이합니다. 권선징악이자 사필귀정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이토록 돌고 돌았음에도 흥미롭게 들려주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죠. 과정이야 어찌됐건, 이유가 어찌됐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벌어진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편법도 언젠가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수리남>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