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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Oct 29. 2022

<변호사 쉬헐크> 리뷰

보증금 다 까먹은 셋방살이


<변호사 쉬헐크>

(She-Hulk: Attorney at Law)


 <미즈 마블>이 끝나고 한 달만에 돌아온 마블 스튜디오의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변호사 쉬헐크>입니다. TV 시리즈 <오펀 블랙>으로 인기를 끌었던 타티아나 마슬라니를 주인공으로 마크 러팔로, 팀 로스, 진저 곤자가, 르네 엘리스 골즈베리, 자밀라 자밀, 베네딕트 웡, 찰리 콕스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8월 18일부터 지난 10월 13일까지 총 9부작으로 막을 내렸죠.



 성공적인 변호사 커리어를 향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는 제니퍼 월터스. 그녀의 특이사항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브루스 배너, 헐크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이죠. 간만에 사촌오빠와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웬 외계 전함의 급습으로 사고에 휘말리고, 브루스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 쉬헐크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어벤져스보다는 변호사가 되고 싶은 그녀의 앞날은 한층 더 꼬여만 가죠.


 시리즈의 시작과 동시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제니퍼 월터스는 데드풀처럼 제 4의 벽을 깨고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거는 캐릭터입니다. 본인이 TV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시청자들에게 이런저런 위트 있는 말들을 던지죠. 쿠키 영상이 있다거나, 다음 화엔 뭐가 나온다거나, 지금 이게 맞냐는 식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등 소소한 재미 포인트가 됩니다.



 똑같이 행동하는 데드풀은 19금 고어 액션을 선보였지만, 가족적인 디즈니와 이런 연출이 만나면 상큼한 일상 드라마가 되기는 딱 좋습니다. 제니퍼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마치 내 친구 제니퍼에게 직접 듣는 광경이 가능해지죠. 실제로 <변호사 쉬헐크>는 제목에 '변호사'가 들어가는 것이 무색할 만큼, 제목을 듣고 기대하게 되는 법정이나 재판과는 거리가 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호사 쉬헐크>가 갖고 있는 가장 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제니퍼는 쉬헐크가 아니라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쉬헐크는 제니퍼사 선택한 정체성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제니퍼에게 쉬헐크를 발견하고 요구합니다. 자신은 분명 쉬헐크가 아니어도 충분히 똑똑하고 능력있는 변호사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데,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죠.



 이는 작품의 방향성과도 큰 연관성이 있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세상에 선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죠. 비록 이를 전달하는 방식마저도 다짜고짜 나는 이렇게 완벽한데 세상엔 멀쩡한 놈들이 하나도 없어서 억울해 죽겠다는 식의 1차원적인 접근을 택하고는 있지만, 변호사 제니퍼 월터스와 수퍼히어로 쉬헐크를 연결하는 뚜렷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런데 <변호사 쉬헐크>는 이토록 억지로, 서툴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시트콤도 아닌 시리즈가 그 어떤 방향성도 없습니다. 이렇다할 기승전결이 없으니 장르도 불분명하고, 남는 것이라고는 난데없이 튀어나와 스스로도 불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체성을 보는 이들에게 강요하는 낯선 사람뿐이죠.



 제니퍼를 포함해 이번 시리즈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두 개의 에피소드를 위해, 한두 마디의 대사를 위해 기존 마블 유니버스에 숟가락을 얹은 캐릭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지금껏 팬들의 애정을 있게 한 캐릭터들을 들먹이며 자신이 그들과 비교했을 때 못난 것이 무엇이 있냐며, 오히려 못난 것은 그들인데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냐며 따지고 들죠.


 니키, 말로리, 타이타니아 등 아무런 개성도 효용도 없는 캐릭터들만 가지고는 동력이 떨어질 때쯤 헐크, 웡, 데어데블, 어보미네이션 등 마블 팬이라면 일단 촉각을 곤두세울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씩 내밀며 수명을 연장합니다. 그러면서도 뭐가 어찌됐고 누가 어떻게 나오든 이 이야기는 나 제니퍼 월터스의 이야기임을 잊지 말라는 듯 그녀의 존재감을 끼워넣죠.



 심지어 <변호사 쉬헐크>는 본인의 문제점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음에도, 극중 꽤 한심한 남정네들의 무리를 설정한 뒤 그들의 입으로 그 비판점들을 토해냅니다. 인생 패배자들이 모여서 쉬헐크는 그저 운이 좋아서 헐크의 능력을 얻은 것이 아니냐며 찌질대는 모습을 보여주죠. 충분히 나올 만한 이야기를 그렇게 전시하는 태도는 전혀 공정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지향점도 없이 그저 캐릭터와 사건을 늘어놓기만 하고, 제니퍼 월터스는 어찌저찌 굴러가는 그 바퀴 위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쉬헐크의 반대편에 서서 극을 같이 지탱해야 할 악역이 부재한 것도 큰 약점이죠. 극을 진행할 때 악역이 꼭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타이타니아, 어보미네이션, 인텔리젠시아까지 '사실 아니지롱' 식의 짧은 눈속임으로 연명하는 것은 김이 새고 또 샐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엔 끝까지 재판장에서 활약하는 변호사도, 악당들과의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하는 쉬헐크도 없습니다. 쉬헐크는 본인이 원하지 않았으니 그랬다쳐도, 제니퍼가 유능한 변호사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자만이 되기 직전인 자신감뿐이죠. 그게 편해서 그렇게 9화까지 이끌고 온 것은 본인임에도 마치 자신도 그런 전개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듯 묘사된 9화의 급전개는 어찌 보면 최후의 발악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으로 회귀해 찰흙덩어리들이 움직이는 듯한 CG 수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리즈 전체를 상징하거나 기억에 각인될 만한 명장면 또한 단 한 장면도 없고, 새로운 인물들을 소개해야 하는 신작의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죠. 여기 새로 나온 그 누구도 영화 시리즈에 단역이 아닌 주연, 혹은 조연의 역할조차 부드럽게 가져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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