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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Nov 23. 2018

<국가부도의 날> 리뷰

주운 뼈대에 분노로 둘러친 연막


<국가부도의 날>
★★


 2016년 내기 볼링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범죄 오락 영화 <스플릿>을 선보인 최국희 감독의 신작, <국가부도의 날>입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사건이었던 IMF 사태를 다룬 영화가 마침내 등장했네요. 영화들을 열심히 보다 보니 이제는 'International Monetary Fund'보다는 톰 크루즈의 'Impossible Mission Force'가 먼저 떠오르게 생겼습니다.



 때는 1997년, OECD 가입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자축하며 최고의 경제 호황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던 바로 그 때. 곧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정부는 뒤늦게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 팀을 꾸립니다. 한편, 홀로 이를 예감한 금융맨 윤정학은 이 거대한 위기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결심하죠.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작은 공장 사장이자 평범한 가장 갑수는 큰 거래를 해내고 소박한 행복을 꿈꿉니다.

 여러 영화들을 거치며 '사상 최악의'라는 수식어의 힘은 많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국가부도의 날>이 주목한 IMF 사태에 붙일 수 있는 말임은 분명합니다. 영화는 벌써 20년이 지나며 어렴풋한 기억이 된 그 때 그 시절을 재구성합니다. 뉴스와 자료화면을 이어붙이고, 정부와 소시민까지 각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내세웁니다. 나라가 내려앉을 위기에 대응하는 같고도 다른 각자의 방식과 계획을 살핍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그 후폭풍을 다루었던 <빅 쇼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봉 전부터, 줄거리를 읽었을 때부터 충분히 겹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국가부도의 날>은 <빅 쇼트>가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오지 않았을 영화입니다. <빅 쇼트>를 보고 '이거 IMF 사태 어떻게 끼워 맞추면 영화 하나 나오겠다' 싶은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전체적인 구성부터 캐릭터, 심지어 몇몇 장면까지 유사합니다. 똑같이 경제 위기를 다룬 영화니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빅 쇼트>와 <국가부도의 날>이 다루는 경제 위기는 그 근간부터 속성이 전혀 다릅니다. 그를 간과한 채 IMF라는 사건의 디테일에 맞추어 부품들을 억지로 대응시키니 합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생소한 경제 용어들은 분명히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잠깐 자막을 띄워서 설명하건 주인공들이 서로의 대화에서 굳이 풀어 말하건 관객 입장에서 못 알아듣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심지어 후자는 서로 알아들어야 정상인 상황에서 쉽게 말할 이유가 없으니 개연성까지 흔들립니다. <빅 쇼트>는 카메오를 이용한 위트 있는 연출로 이를 타개했고, 차마 그것까지 옮길 수 없었던 <국가부도의 날>은 후자를 택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작은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부도의 날>이 가진,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선악 구도에서 나옵니다.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어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판단과 그 결과만이 있을 뿐입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책임 소재가 분명했습니다. 고객들을 속이며 자신들의 사욕을 챙긴 은행들 탓이었고, 그들이 '악'을 자연스레 가져갑니다. 하지만 IMF 사태는 결이 전혀 다릅니다. 

 심지어 영화도 그것을 내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악 구도를 형성하는 데에서 부리는 억지는 이 때문입니다. 똑 부러지는 주인공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의를 위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이며, 그와 대립하는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격, 말투, 표정, 눈빛, 단어 선택, 가부장 꼰대 사상까지, '못된' 것의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미워해야 하고 싫어해야 할 캐릭터임이 이미 점찍혀 있습니다. 너무나 1차원적이고 단순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유치합니다.



 <빅 쇼트>를 참고했지만 한계에 맞닥뜨리는 순간은 쉴새없이 나옵니다. 유아인의 윤정학은 <빅 쇼트>의 주인공 4인방을 죄다 합친 캐릭터입니다. 해당 4인방은 영화 내내 경제 지표를 끊임없이 분석하며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각자의 장단점을 서로가 보완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무턱대고 합쳐 놓은 윤정학은 맨 첫 장면에서 도표 몇 개와 통화 몇 통으로 모든 판단을 끝내고는 자신은 속지 않겠다며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합니다. 근거를 토대로 예측을 하는 똑똑이가 아니라 신내림을 받은 도사입니다.

 그런 그를 따라다니는 두 명의 투자자 캐릭터들은 4인방을 재현하기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합니다. 97년도에 '개멋있다'라는 말을 쓰는 무신경함이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과장된 히피 개성은 애교입니다. 애초에 투자자일 뿐인 사람들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으며, 이들과 함께하며 반복되는 유아인 특유의 감정 과잉 연기는 <버닝>에서와는 정반대의 불협화음을 냅니다. 혼자 자신의 말에 취해 연극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이 상황에서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장면에선 <빅 쇼트>의 향기가 절정에 이릅니다.

 캐릭터가 많으니 정신도 없습니다. 산재한 사건들을 번갈아 보여주며 몇 번이고 강조하는 선악 구도는 영화적 재미와 소재 본연의 맛 사이에서 더없이 표류합니다. 이들을 어떻게든 서로 연결지어 보려는 최후반부 장면들은 통째로 사족 덩어리입니다(최소 40대여야 정상인 유아인을 그대로 내보내는 용기도 한몫합니다). 덧붙이는 장면이 그 앞 장면들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자충수가 연속되고 쏟아집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악순환 그 자체인 캐릭터 묘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바로 뱅상 카셀이 연기한 IMF 총재죠. 이 캐릭터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을 해냅니다. 냉정하고 깔끔합니다. 선의도 악의도 존재하지 않지만, 판단의 자유는 관객에게 주어집니다. 모든 캐릭터가 이렇게 그려졌어야 합니다. 정말 절실합니다.

 무턱대고 꺼내놓기만 하는 개성과 설정들은 책임지지 못할 것이 아니라 책임지지 않을 것들로 밝혀집니다. 이런 연출의 근본적인 함정은 거울에 비추면 선악이 그대로 뒤집힌다는 겁니다. 얄미운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는 한시현을 응당 해야 할 일에 대책도 없이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방해물로 그리면 그만입니다. 큰 줄기는 실화를 토대로 했으니 건드릴 것이 없고, 그 위에 붙인 살엔 멀쩡한 구석이 많지 않습니다. 소재와 배우가 낼 수 있었던 잠재력과 시너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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