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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Nov 19. 2022

<데시벨> 리뷰

터지지는 못하고 소란스럽기만


<데시벨>

★★


 2014년 <몬스터> 이후 8년만에 돌아온 황인호 감독의 신작, <데시벨>입니다. 김래원, 이종석, 정상훈, 박병은, 이상희, 조달환, 차은우와 함께했고, <몬스터>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민기가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네요. 제작비 120억 원을 들여 손익분기점이 관객수 24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오는 11월 16일 개봉 예정입니다.



 참사가 될 뻔한 사고에서 전우들을 구해내 영웅으로 추대된 전직 해군 잠수함 부장 강도영 중령. 모두가 추켜세우는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그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굉음과 함께 단독 주택이 폭발했다는 속보가 전해지고, 뉴스를 지켜보던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죠. 소음이 커지면 폭발하는 특수 폭탄을 설치했다는 설계자는 그에게 그 날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 선언합니다.


 단순히 돈이 아닌 분명한 신념이나 목적을 따라 움직이는 테러리스트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막는 것이 급선무이긴 하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도 이런 짓을 이어가는 이유에 주목해야 하죠. 연속되는 사건들은 세상의 이목을 끌고 관련된 사람들을 최대한 수면으로 이끌어내려는 수단일 뿐, 본격적인 메시지는 그 이후에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앞선 사건들을 가볍게 묘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목적이야 어찌됐건 수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킬 각오로, 혹은 극중 실제로 희생해 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죠. 그를 뒤쫓는 주인공 및 공권력의 입장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해결해야 하고, 그만큼 매끄러운 지략 대결이 뒤따라야 합니다.


 특히 <데시벨>은 소리 폭탄이라는 특수한 소재를 영화의 제목을 포함한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일정한 데시벨이 넘는 소음을 감지하면 남은 시간이 절반으로 계속해서 줄어드는 시한폭탄이죠. 이것이 축구 경기장 등에 설치되는 순간 폭발 자체는 물론 사람들의 환호 등 통제해야만 하는 긴장 유발 요소들이 단박에 늘어납니다. 바로 그 지점이 <데시벨>이 소리 폭탄을 소재로 택한 이유겠구요.



 후반부에 맞춰지는 사건의 전말에서는 이 영화의 각본이 출발한 지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 명의 인간이 내리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데, 그것을 뿌리 삼아 극중 선과 악이 만들어지고 폭탄 테러와 그를 막으려는 세력 등이 갈라지죠. 얼개만 놓고 보면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고, 주인공인 도영의 입장과 감정선을 따라가며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초중반부에 생겨나는 의문들을 종국에 해소하는 영화는 많지만, <데시벨>은 그것을 핑계 삼아 다른 설정 구멍들을 얼렁뚱땅 무마하려 합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기에 앞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열 개쯤 된다고 치면 설명이 되는 부분은 한두 개뿐이죠.



 게다가 나머지 여덟 개는 애초에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이 되지 않는, 쉽게 말해 개연성과 설득력이 지독히도 떨어지는 것들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상훈 배우의 오대오 기자가 될 텐데, 기자 정신을 들먹이며 자기 자식까지 내팽개친 채 도영의 곁을 지키며 시덥잖은 유머로 일관하죠. 박병은 배우의 차영한 또한 온갖 무게는 다 잡으면서 허탕에 허탕만 거듭하다가 안 나오느니만 못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정확히는 캐릭터 자체가 각본의 필요에 따라 들쭉날쭉합니다. 도심 곳곳은 물론 들어갈 수조차 없어 보였던 곳에 폭탄을 설치할 땐 IQ 170의 천재 테러리스트라더니, 주인공이 활약해야 할 땐 헐겁기 그지없는 계획이 치밀한 것으로 포장되어 주인공에게 파훼되는 식이죠. 이것이 정점에 달하는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신파의 농도를 높여 그 구멍을 메우려 하구요.



 어쩌면 영화의 유일한 정체성이 될 만한 소리 폭탄이라는 소재조차 그 자체의 참신함을 제외하면 이 개연성 문제를 피해가지 못합니다. 후반부 들어서 그토록 강조하는 영화의 주제의식과 아무런 상관도 없을뿐더러, 첫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리를 활용한 긴장 상황조차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큰 소리가 나면 시간이 줄어드는 폭탄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다 그를 활용하지도 않으니 딱히 나올 이유가 없죠.


 답을 섣불리 정할 수 없는 딜레마를 내세웠음에도 영화는 강도영과 전태성을 선과 악의 대립각으로 치환시켜 너무나 손쉬운 정답을 제시합니다. 한 쪽이 처음 본 아이를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이고 다른 한 쪽이 자신의 계획에 걸리적거리는 사람은 죄다 칼로 찔러 죽이는 사람이라면, 그건 관객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 어떤 이유를 들이밀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구도죠.



 초중반부의 테러, 최후반부의 테러, 영화를 관통하는 숨은 사건 등 굵직한 구성 요소들이 모두 서로와 섞여들지 않습니다. 이어지지 않는 기승전결을 끌고 가는 주조연들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 너무 많아 감당하지 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애초에 무대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밖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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