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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Feb 27. 2023

<화이트 노이즈> 리뷰

두려워하는 모습마저 재치있고 멋진 나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

★★☆


 2019년 <결혼 이야기>를 내놓았던 노아 바움백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아담 드라이버를 주연으로 그레타 거윅, 돈 치들, 래피 캐시디, 샘 니볼라 등이 이름을 올렸죠.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어 꽤 인기를 끌었었고, 오는 12월 30일 넷플릭스 공개를 앞두고 여느 넷플릭스 작품들이 종종 그러하듯 극장에서 선개봉되었습니다. 상영은 지난 7일부터 이루어지고 있네요.



 히틀러를 전공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수이자 가장인 잭. 그런 그에게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사랑과 죽음, 행복의 가능성이라는 인류 보편의 수수께끼와 씨름하는 동시에 일상적인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려 애쓰는 오늘날 미국 가정의 모습이 녹아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마을을 휩쓴 독극물 사태는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지만, 그조차도 어쩌면 평범한 일상의 일부일지 모릅니다.


 요란하고 뻑적하지만 그조차도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는 모든 것. 소음이지만 소음이 아니게 되는 것. 제목에 충실한 영화 <화이트 노이즈>는 오늘날까지 만들어진 미국의,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압축하고 은유해 한 사람과 가정의 일대기로 녹여낸 영화입니다. 많은 장면과 대사들, 그리고 그것들의 충돌은 더욱 거대하고 일반적인 무언가를 가리키는 그림들이죠.



 주인공 잭은 히틀러를 연구하고, 동료 머레이는 엘비스를 연구합니다. 그들 둘의 열성적인 강의가 섞여드는 장면은 마치 히틀러와 엘비스에게 생각보다 많은 접점과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강렬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은 두 사람은 각각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상징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한 군데에 결집시켰죠. 오늘날의 미국은 전 세계의 삶에 그렇게 기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은 다르다고 이야기하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고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탈을 쓴 무언가 앞에서는 우리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군중을 향합니다. 무리를 빠져나가는 것도 잠시일 뿐, 자유롭게 엑셀을 밟을 수 있었던 곳에서 돌아와 선택하는 것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이죠.



 결정의 순간엔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삶은 지나고 보면 그렇지 못했던 선택들의 연속입니다. <화이트 노이즈>는 인간을 그런 역설적인 존재로 만드는 이유로 바로 죽음을 향한 공포를 들었죠.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져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이성적이지 못한 것들을 이성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독극물 유출이라는 사건을 꺼냅니다. 분명히 무언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상은 쉬쉬하는지 관심이 없는지 모릅니다. 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노출되어 진단과 분류까지 받았음에도 증상은 알 수 없고 결과는 30년씩이나 지나야 지켜볼 수 있답니다. 평소 갖고 있던 죽음의 두려움을 피부 밖으로 잡아 꺼내기에 이보다 좋은 수단이 없죠.



 이렇게 우리의 민낯을 대놓고 보여주려는 영화라면 응당 해결책은 준비해 놓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포문을 연 이상 문제가 있다면서 역정을 내기만 하는 것보다야 멀쩡한 답변이 있어야겠죠. 그 대답으로 <화이트 노이즈>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내내 잭의 환각과 현실을 오가며 불친절하던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설집을 읽어주듯 설명하죠.


 정확히는 희망 그 자체보다는 희망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내레이션에 앞선 머레이, 그리고 수녀와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죠. 팩트(자막을 '사실'이 아닌 '팩트'로 표기했으니 거기 따르자고 한다면)와 믿음은 대칭 관계에 있습니다. 팩트는 관계를 병들게 하는 반면 믿음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뭐가 됐든 어쨌든 무언가가 있다고, 혹은 없다고 믿는 행위가 지금의 나를, 우리를, 체제를, 세상을 있게 합니다.



 문학적으로는 꽤 짜임새가 있는 흐름입니다.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철학 논문을 인물과 사건에 엮어 진입 장벽을 낮춘 것처럼 보이죠. 결과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그러려고 시도했습니다. 어려운 개념들을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그린 학습 만화같달까요. 만화로 보여준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다른 매체보다야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화이트 노이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스스로가 가르치려는 바에 취하고, 그런 것을 가르치는 스스로의 모습에 한 번 더 취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이리저리 던지면서 마치 이 모든 것들은 정확한 의도 하에 배치되었다고 우기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묶는 제목이 바로 '백색 소음'이 아니겠냐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은 지휘자의 공손한 인사를 방불케 하죠.


 백과사전의 페이지들이 흩날리듯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과 답변들이 공기 중에 흩날립니다. 환각과 현실을 교차하며 개연성을 의도적으로 뭉개는데, 그렇게 뭉개 놓은 개연성을 무기 삼아 어물쩡 넘어가기를 시도하는 순간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상 인물과 사건의 기승전결이 토대가 되어야 함을 잊고 핏대 세운 외침으로 많은 것을 대신하려 하죠.



 시대와 인간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가르치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됩니다. 제아무리 주인공을 교수로 설정했다고 해도 둘러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말하려는 바가 너무나 옳고 훌륭한 것이더라도, 그걸 알아듣게 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외양과 과정이 영 본받을 만하지 못합니다. 그걸 모두 감수할 만큼 대단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기에 뒷맛은 썩 좋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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