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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Feb 28. 2023

<유령> 리뷰

구구마다 절절한 정신 승리


<유령>

★☆


 2018년 <독전> 이후 5년만에 돌아온 이해영 감독의 신작, <유령>입니다. 포스터 하단에도 적혀 있듯 마이지아 작가의 소설 <풍성>을 원작으로 두었으나, 배경에 맞추어 각색을 거치면서 원작과는 꽤 다른 작품이 되었다고 하죠.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 서현우를 주연으로 CJ 엔터테인먼트에서 137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했고, 지난 1월 18일 개봉되었습니다.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인 유령이 비밀리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카이토는 흑색단의 총독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령을 잡을 덫을 놓죠. 영문도 모른 채 벼랑 끝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기필코 살아나가 동지들을 구하고 총독 암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유령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암살>, <밀정>, 근현대사 쪽으로 오면 <공작> 등 떠오르는 영화들이 몇 편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편이어야 하는 곳을 무대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누구 하나 걸려드는 순간 목숨 따위는 우습게 오가는 심리 스릴러죠. 영화는 응당 모두가 찾는 그 사람의 정체를 숨기며 찾으려는 자와 숨으려는 자의 대립각을 무기 삼아 장르를 조금씩 확장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령>은 초장부터 다른 노선을 타고자 합니다. 조선총독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려는 흑색단이라는 조직이 있고, 그 흑색단에서 파견한 스파이가 바로 유령이죠. 하지만 영화는 딱히 유령의 정체를 숨기는 데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비슷한 설정을 차용한 다른 영화라면 최소한 뒷모습, 그림자 등으로 유령의 정체를 숨기면서 출발하는 것이 전개의 전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령>은 무언가 다릅니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나중을 위해 아껴야 할 것을 미리 풀었으니 더 대단한 것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그러나 중반부까지 향하는 동안 더 있을 무언가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야 하는데, 뭘 더 보여줄 생각은 딱히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납니다. <유령>은 무리 속의 스파이를 색출하는 심리 스릴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고 하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치장에 한껏 힘을 주고 무언가 있을 것만 같은, 있어야만 하는 분위기를 내려 오케스트라를 불러 연주를 하더니 올라간 막 뒤는 텅 비어 있습니다.


 실로 충격적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해야 하는 인물들을 모았습니다. 심지어 시작과 함께 판을 짠 사람의 입을 친절하게 빌려서 여러분은 이제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딱히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처음부터 딱히 그럴 이유를 서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굳이 구실을 찾아보자면 이들에게는 서로 각자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남을 팔아먹을 이유까지는 없고, 이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각자의 계획대로 소소하게 움직이는 와중,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고 부도덕할 것 같은 악당은 방아쇠 하나 당길 용기가 없어서 판을 진전시키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을 근본적인 핑계조차 증명하지 못합니다. 모이라면 모이고 의심하라면 의심하라며 혼자만 성이 잔뜩 나서 빡빡 우기는 와중 누구도 거기에 집중하지 않으니,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 또한 흥미롭게 볼 여지가 없습니다. 소소하게 굴러가는 작당모의는 있으나 큰 판을 움직이는 수레바퀴는 없어 동력이 너무나 부족하죠.



 영화는 편리하게도 그 빈 자리를 시대에서 찾습니다. 나라를 위해 모이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정의와 대의를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올려 놓고, 이를 따르는 모든 캐릭터들을 불사의 사도들로 묘사하죠. 감히 이들 앞에 서고 이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극중 악역은 물론 스크린 밖에서까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신감으로 당당히 나아갑니다.


 문제는 그것의 형성에 영화의 기여도는 전무하다는 겁니다. 영화는 그저 거기에 간편하게 기댈 뿐이죠.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어떤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의 맹목적이기까지 한 이 영웅시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한 장면에만 딱 한 번 써도 아슬아슬할 허용을 남발하게 만들고, 결국 몇 발자국 가지 못한 곳에서 영화를 통째로 무너뜨리죠.



 게다가 영화는 스스로가 무너진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한껏 달아오른 아드레날린에 취해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지 못합니다. 1편이라는 것이 나왔다면 그닥 나오리라 기대하지 않았을 속편과 외전까지 하나의 영화에 그대로 이어붙여 질주를 멈추지 않죠. 뒤죽박죽이 된 기승전결에 장르와 캐릭터 또한 뒤섞이고 남은 것이라곤 우리가 이렇게 멋지고 위대하다는 자화자찬식 시각적 연출뿐입니다.


 제목이 유령인 영화치고 유령이라는 것은 그 어느 순간에도 중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극중 누군가 너는 내가 유령일지도 모르니까 날 죽이지 못한다며 떵떵대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이미 그 중요한 인사들을 그들의 의지에 반해 그런 외딴 곳에 모은 이상 그냥 다 죽여버리고 유령을 검거했다며 사건을 마무리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죠. 영화는 이런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문조차도 해결할 의지가 없구요.



 영화 밖의 메시지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관통합니다. 결말부가 이미 누가 죽고 사는지까지 포함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에 거기에 맞춰서 모든 상황과 전개를 끼워맞추는 것처럼 보이죠. 원인으로 결과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원인을 만들어 나가는 그림에 고개를 끄덕여 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원인이라고 불러줄 수 있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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