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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Feb 28. 2023

<교섭> 리뷰

설득하기를 설득하지도 못한 채


<교섭>

★★


 <제보자>, <리틀 포레스트> 이후 간만에 돌아온 임순례 감독의 신작, <교섭>입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에서 약 150억 원이라는 큰 제작비를 투입해 촬영한 작품으로, 황정민, 현빈, 강기영 등이 이름을 올렸죠. 한때 전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샘물교회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해영 감독의 <유령>과 함께 지난 1월 18일 개봉되어 관객수 100만 명을 이제 막 달성했죠.



 분쟁 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에게 납치되는 최악의 피랍 사건이 발생합니다. 교섭 전문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처음인 외교관 재호가 현지로 향하고, 무대포로 악명이 높은 국정원 요원 대식을 만나죠. 입장도 방법도 다른 두 사람은 인질을 살려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지만, 살해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교섭의 성공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만 갑니다.


 (우연찮게도) 황정민 배우의 <인질>, 현빈 배우의 <협상>, 그리고 2021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었던 <모가디슈> 등 몇 작품이 떠오릅니다. 타지에서 피랍된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두 사람이 나섭니다. 한 명은 머리로, 한 명은 몸으로 부딪히는 스타일이라 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죠. 그러나 이내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대의로 뭉치는 그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가야 할 길은 크게 두 갈래가 있겠습니다. 하나는 소위 말하는 버디 무비죠. 수식하는 단어들만 놓고 보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 것만 같은 두 주인공이 티격대다가 둘도 없는 동료로 거듭납니다. 비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하게 굳는 공식을 지켜야 하니 일을 한두 번 정도는 크게 틀어야 하겠고, 극적 긴장감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확보되겠죠.


 다른 하나는 그 상극이었던 둘을 뭉치게 한 대의의 전달입니다. 서로의 근원적인 사상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라면, 응당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해 스크린 안에서만 신나서 끄덕거렸다간 도대체 지금 자기들끼리 뭘 하고 있냐는 소리 듣기 십상이라는 것이죠. 말이 두 갈래지 멀쩡한 영화라면 결과적으로는 두 길을 모두 가야 맞겠습니다.



 특히 <교섭>처럼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라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실화일수록 그만큼의 추가적인 설명을 아낄 수 있지만, 그 편의에 일차원적으로 기대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죠. 영화가 하고 많은 이야기들 중에 이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기겠다고 선택한 이유를, 굳이 비슷한 설정의 가상 인질극이 아닌 진짜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를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교섭>은 거기서조차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보통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이런 실화가 있었음을, 이런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가 있었음을 전달하는 데 효용을 다하곤 하죠.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샘물교회 사건은 자세한 내막을 포함한 기승전결이 꽤 정확하게, 그리고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테러 집단에게 끌려간 인질들은 무고한 피해자가 맞지만, 여기선 아니죠.



 바로 이 지점이 샘물교회 사건을 다른 국가적인, 세계적인 인질극들과 구분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영화에겐 당연히 너무나도 특수한 이 사건을 영화화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를 러닝타임 내내 증명해야 하는 의무를 안게 됩니다. 이들을 순교자로 영웅시하건 국가적 망신과 손해를 발생시킨 민폐 집단으로 묘사하건 그것은 영화의 마음이지만, 어느 방향이건 영화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탱할 의무가 있죠.


 그러나 <교섭>은 아주 놀랍게도, 그리고 뻔뻔하게도 아무런 선택을 내리지 않습니다. 마치 이 사건이 다른 비슷한 사건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는 듯 행동하죠. 물론 인질들이 나라에서 가지 말라는데도 억지로 갔다가 잡혔다는 언급, 도대체 왜 애먼 사람들을 고생시키냐는 대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도 생명이고 국민이라는 외침, 마치 성녀를 묘사하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연출 또한 있죠.


 하고 많은 사건들 중에 이걸 영화화겠다고 선택한 이상 자신은 공평한 중도를 걷겠다며,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며 뒷짐 지고 깨끗한 척 하기는 너무 늦었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발자국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했죠. 그러나 영화는 그 곳에서 아주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 두 남자의 희생쯤에 고개를 억지로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메시지에서 고개를 돌렸다면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을 때 아주 작은 변명의 여지라도 생겼겠으나, <교섭>은 그마저도 실패합니다. 언제 봤다고 몇 마디 나누더니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구는 캐릭터들부터 12세 관람가에 만족하는 뜨뜻미지근한 액션, 통째로 들어내도 전개에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일회성 이벤트들로 긴장을 강요하죠.


 게다가 제목이 <교섭>인 영화치고는 막상 영화의 동력을 책임지고 종국에는 클라이막스를 장식해야 하는 협상마저도 큰 극적 전환점이나 인상을 남기지 못합니다. 극중 협상을 주도하는 재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묘수가 최소한 한 번은 나와야 체면치레라도 되었을 텐데, 영화가 유발하는 놀라움은 사건의 탁월한 해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도 일을 굴러가게 할 수 있다는 쓴웃음에 가깝죠.



 장르로도 메시지로도 향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다가 둘 다 놓쳤습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잡았어야 하는 영화였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제이자 결과죠. 설명했어야 하는 것을 설명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을 뚝심 혹은 결단쯤으로 밀고 나가려는 듯한 모습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들을 사람은 테이블에 앉지도 않았는데 다 쏟아내고는 흡족한 웃음을 띄우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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