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지 Jul 15. 2023

<더 웨일> 리뷰

보루에 내몰린 몸부림


<더 웨일>

(The Whale)

★★★★


 2017년 <마더!>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신작, <더 웨일>입니다. 사무엘 D. 헌터의 동명 연극을 원작으로 두었으며,<미이라> 시리즈의 브랜든 프레이저를 주인공으로 홍 차우, 세이디 싱크, 타이 심킨스 등이 뭉쳤죠. 지난 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기립 박수를 받으며 현장에서 함께했던 브랜든 프레이저가 감동의 눈물을 보였더랬습니다.



 270kg 거구의 몸으로 온라인 작문 강의를 하며 살아가는 찰리. 매번 들르는 간호사 리즈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의 앞에 '새 생명' 교단의 선교사 토마스가 나타나죠. 토마스는 다가오는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겠다는 찰리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엔 8년 동안 보지 못한 딸 엘리와의 오래된 갈등과 응어리가 있음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말 그대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초고도비만의 주인공. 화장실을 가고 샤워를 하는 등 아주 간단한 일상생활조차 어려울 지경으로 자기 자신을 내몬 데엔 분명 어떤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조금씩 들려주는 이야기에선 그 퍼즐들을 하나둘씩 맞출 수 있죠. 젊은 날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사랑 때문이었고, 그 사랑이 자신을 떠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찰리에겐 마지막 희망이 있습니다. 살면서 가졌던 선택의 기회들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리고 말았지만, 그런 그를 구원할 하나의 기회가 남아있었습니다. 자신을 끔찍이 챙기는 친구 리즈도, 우연한 기회에 생명의 은인까지 되어 버린 토마스도 아닙니다. 바로 그의 존재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딸 엘리였죠.


 구렁텅이로 내몰린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흔히 외부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스스로 내린 선택 탓에 그 곳으로 향했던 누군가에겐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죠. 스스로를 구할 여유와 기회는 이미 날아간 뒤이기에,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어 줄 존재가 바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누가 보아도 지금의 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줄 존재'는 리즈와 토마스입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안위를 살피죠.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찰리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죠. 누군가 기꺼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찰리의 신세에선 매 순간 그 관계 자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물론 찰리가 기본적으로 악한 인물은 아닙니다. 스스로 후회할 만한 선택들을 내린 인생을 살아 오긴 했으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마지막 순간엔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충분히 지니고 있죠. 리즈, 토마스와 갖고 있는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바라보고 있는 곳은 거기가 아니죠.



 딸 엘리의 행동거지는 성장기의 방황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도 어딘가 지나칩니다. 겉으로 틱틱대며 얼핏 말을 듣는가 싶으면서도 상대방의 처지를 악질적으로 조롱하거나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죠. 어린 시절 찰리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찰리에게 저지르는 어떤 악행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 그 판단이 맞다고 받아들일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구요.


 심지어 찰리도 그를 알기에 엘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엘리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자신이 그럴 명분을 주었다고 움츠러들죠. 동시에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보다는 잘 될 수 있는 것을 발굴하고자 합니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등 문학적 재능이 충만한 찰리는 엘리 또한 그런 잠재력을 타고났으리라 확신하고, 어찌됐건 자기 딸이기에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죠.



 바로 여기가 <더 웨일>이 다루려는 지점입니다. 현재의 찰리는 분명 유약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과거엔 자신의 부인과 딸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기도 하죠. 법과 도덕의, '잘못된'과 '옳지 않은'의 경계선에서 행동하던 그는 과정이 어찌됐건 지금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후회와 기다림뿐, 그래도 일상의 순간순간에 찾아오는 작은 위안들에서 힘을 얻어야 하죠.


 그러면서도 내심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헛된 삶을 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증명은 스스로의 판단과 그를 인정하는 타인의 판단이 맞물려야 가능한 것이죠. 비록 이제껏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흘러왔지만, 내 평생 가장 뚜렷하게 믿는 무언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지금의 찰리에겐 다름아닌 엘리가 그런 존재인 셈이구요.



 단순한 선악의 분류를 넘어섭니다. 누군가는 그런 찰리의 모습을 보고서도 끝까지 이기적인 위선자라고 비판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가까운 타인이나 어쩌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죠. 영화는 그의 옳고 그름을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약한 순간의 가장 강렬한 절박함을 다룹니다. 그 나약함과 강렬함의 격차가 거대할수록 찬란한 구원이 되겠지요.

작가의 이전글 <똑똑똑>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