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기둥기 판타지
민용근 감독과 김다미, 전소니, 변우석이 만난 NEW의 신작 <소울메이트>입니다. 2017년 국내 개봉된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원작으로 두고 있으며, 지난 3월 15일 개봉되어 23만 관객을 동원했죠. 제작비가 높은 장르가 아님에도 해외 촬영 등으로 손익분기점이 상대적으로 높게 설정되어 있는 터라 꽤 아쉬운 성적으로 막을 내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함께하며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된 미소와 하은.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순간은 기어이 찾아오고야 말고, 10대 후반 무렵 하은이 동급생 진우와 첫사랑을 시작하며 미세한 균열을 겪게 됩니다. 자유분방한 미소는 도시로 떠나 모험적인 삶을 좆고, 고향에 남은 하은은 안정된 생활을 찾으며 둘은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죠.
포스터와 줄거리, 스틸 사진 등 영화의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지향점은 분명합니다.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바로 그 시기, 이슬 젖은 필름 카메라 감성이 가득한 청춘들의 이야기죠. 되돌아보는 내레이션의 맨 마지막 문장 뒤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침표가 될 것 같은 텍스트가 가득합니다. 그 땐 몰랐지만 그 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이죠.
개중에서도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미소와 하은이라는 두 주인공의 우정입니다. 친구나 연인이라는, 일반적으로 깊은 관계를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들로는 그 깊이와 층을 완전히 수식할 수 없는 사이죠. 영화는 초중반부에 걸쳐 그들 관계의 특별함을 드러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 뒤에 나오는 사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영화는 극중 사건을 관객이 아닌 두 사람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세상이 뭐라하든 네가 있고 내가 있다는 사실이 두 사람에겐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있지만, 피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핏줄보다 가까운 사람이 있음을 납득시켜야 이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맞서 등을 마주대고 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릴 때 중요한 것은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서로밖에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해줄 수 없는 상황이 먼저 연출되어야 하겠죠. 이 때의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내막을 알고 있는 데에 멈춰야 하지, 누가 뭐라 하든 맹목적으로 이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소울메이트>는 바로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초중반부 학창시절 장면 중 미소가 하은을 위해 찾아낸 그들만의 아지트가 있습니다. 버려진 펜션에 간단한 집기를 들여 자신들의 구역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여기다 대고 그 공간이 사유지니 뭐니 따지는 것은 다소 치사하죠. 그럴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10대들의 풋풋함으로 허용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다른 장면에선 다릅니다. 동네 잡화점에서 하은은 실수로 진열된 물건을 부수고, 미소는 화를 내는 가게 주인에게 되려 대들다가 도망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꾸미고 유년 시절 함께 목욕하던 추억과 동일선상에 두죠. 스스로의 분위기에 취해 선을 넘는 모범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가게 앞에서 나란히 손을 들고 벌을 받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 등으로 대체되어야 했습니다.
스스로의 풋풋함과 청량함에 취해,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모든 실수를 영화가 저지르는 실수와 구분하지 못합니다. 미소와 하은은 그래도 되지만 영화는 그래서는 안 되는 순간에 매번 그렇게 행동합니다. 결국 미소와 하은은 누구보다 가깝다는 이유로 누구보다 소홀하게 대하게 되는 인간적인 실수가 누적되어 커다란 갈등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쯤 되면 영화는 자신이 보여주는 광경의 무게조차 깨닫지 못하죠.
때문에 중반부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기 시작합니다. 미소와 하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진우의 목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 3자라면 누가 보아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누적되어 둘의 사이는 기어이 파국 직전까지 가지만, 마침내 터져나온 미소의 변명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뿐입니다. 오해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치고는 너무나 감정적이고 얄팍하죠.
이를 이해시킬 만한 최후의 수단은 그런 실수마저도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포장하는 것일 텐데, <소울메이트>는 애초에 그걸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더 나쁜 선택을 하겠지만, 이들은 그런 순간에조차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위한 옳은 선택을 내렸다고 주장하죠. 단언이 아닌 주장이기에 설득이 될 수도 있겠으나, 보여주는 것만 가지고는 영 쉽지 않습니다.
영화가 그걸 실수가 아니라 옳은 선택이라고 주장한다는 근거로는 미소의 행적이 있습니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내몰고 나름대로의 고통은 있었다고 하지만, 진즉에 학업과는 담을 쌓고 하고싶은 것만 하며 살아온 사람을 영화는 대뜸 회사 팀장으로 설정합니다. 뭐가 됐든 이 어린 나이에 번듯한 직함을 달고 있으니 그 전까지의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얕은 수입니다.
게다가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보여준 뒤 사실 이런 내막이 있었음을 이후에 밝히는 연출을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많이 사용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파급력을 내기 위해 한두 번 사용해야 할 연출을 남용하면서 정말 설명이 필요한 오해와 오해가 아닌데 오해인 척 하는 구멍들을 헷갈리게 만들죠.
영화의 시작 부분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술관을 찾은 미소에게 큐레이터는 이 그림의 작가를 아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을 들은 미소는 그런 걸 무례하게도 왜 자신한테 물어보냐는 듯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그를 본 관객들은 자연스레 미소와 그 작가 사이에 무언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나 이후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 따져 보면 거기서 미소가 인상을 찌푸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청춘 영화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과 분위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의탁한 영화입니다. 단점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데, 그를 가리려고 노력하거나 강점과 개성을 늘리는 대신 그런 단점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는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죠. 한 줄 텍스트, 한 장 사진으로 존재할 때 가장 효과적인 이미지들에 살을 붙이고 기승전결을 만들어내려니 무리수가 지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