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어리져 떠도는 신념들
2020년 <작은 아씨들> 이후 간만에 돌아온 그레타 거윅의 감독작, <바비>입니다.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을 주인공으로 아리아나 그린블랏, 윌 페럴, 시무 리우, 킹슬리 벤-아디르 등이 이름을 올렸죠. 마텔 사의 그 유명한 바비를 소재로 삼은 작품으로, 공개된 예고편만으로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더랬습니다. 개봉은 7월 19일 오늘이구요.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랜드'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고 완벽한 삶을 살던 바비. 그러던 어느 날 매일같이 반복되던 일상이 어제와는 영 다르게 느껴지고, 수소문 결과 이를 해결하려면 현실 세계로 나아가 자신과 연결된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바깥 세상은 당연히 바비랜드와 마찬가지로 희망찬 곳이라 기대한 바비는 켄과 함께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모험을 떠나죠.
설정만 놓고 보면 디즈니에서 만들 법한 장난감들의 현실 세계 여행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장난감이기에 연출할 수 있는 초인적인 장면들을 자잘한 농담 삼아 분위기를 가볍게 하고, 동심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마무리하면 딱 바비를 만드는 마텔에서 지원하고 바비라는 영화에 관객들이 기대할 만한 영화가 완성되겠죠. <레고 무비> 정도가 그의 아주 모범적인 예시가 되겠구요.
그러나 그레타 거윅은 그런 이유로 바비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역사적이고 이념적이며 정치적이기도 한, '바비'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바비의 등장이 세상에 끼친 영향을 시작으로 그를 바탕으로 도달한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려 하죠. 주제의식만 놓고 본다면 극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바비>의 모든 것입니다.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의 몸을 빌어 장난감인 바비와 켄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 형형색색의 바비랜드가 선사하는 분홍색 볼거리 등 마치 영화의 정체성을 방불케 했던 시각적인 재미는 영화의 초반부에 끝이 납니다. 오히려 거기에 무게를 실어 눈과 귀가 즐거울 영화를 기대한다면 아주 크게 벗어날 가능성이 크죠.
중반부부터의 동력은 아주 분명합니다. 남성 중심적인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죠. 바비를 여성, 켄을 남성으로 굳힌 뒤 바비들의, 바비들을 위한, 바비들에 의한 완벽한 세상인 바비랜드와 달리 현실 세계는 그와 정반대임을 꽤 많은 장면과 대사를 통해 묘사합니다. 이토록 대단하고 잠재력 있는 바비들을 무시하는 현실 세계의 어긋남과 우스꽝스러움을 의도적으로 대비하죠.
무언가의 대단함을 강조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를 치켜세우는 직접적인 방법,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아둔함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죠. <바비>는 둘 모두를 택합니다. 단점이라고는 없는 바비들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데, 아무런 자격도 능력도 없이 그저 기득권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바비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려 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또 비난하죠.
바비와 켄,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 등 일종의 비유를 통해 쌓아올린 무대가 완성되는 순간 <바비>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타 거윅은 주요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냅니다.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이 불합리하고 역설적인 세상에서 뛰어난 여성으로 살아가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마치 스크린이라는 제 4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설합니다.
꽤 대담한 결정입니다. 특히 1억 5천만 달러를 들인, 다큐멘터리나 독립 영화가 아닌 상업 영화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계급 사회를 무대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을 다루며 성별을 비롯한 많은 유사한 문제들을 상징하는 대신, 하나의 정확한 지향점을 설정한 채 이것은 남성들의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끝없이 고통받아 온 여성들의 목소리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비라는 장난감의 모든 것을 메시지의 무기로 삼았습니다. 바비의 전 세계적인 인기는 자라나는 소녀들에게 이상적인 여성상을 강요했습니다. 인종부터 직업까지 가리지 않았던 바비의 라인업마저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는 남성 기득권층이 여성들에게 제시한, 잘 팔리고 인기가 좋을 또 다른 이상적인 모습에 불과하다고 보았죠.
바비의 무한한 가능성은 어떤 제품이든 출시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바비를 바비라는 장난감에 제한하지 않음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출나건 평범하건 그것은 바비의 자유입니다. 바비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건 그것 또한 그런 바비일 뿐입니다. 대통령 바비, 과학자 바비, 승무원 바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그냥 바비임을 역설하고 또 선언하죠.
그러나 외침이 통렬하다고 해서 그를 전달하는 모든 방식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린 그레타 거윅의 일갈이 고조될수록 영화의 만듦새는 눈에 띄게 헐거워집니다. 애초에 바비랜드니 현실 세계니 하는 것들은 무대를 차리기 위한 재료에 불과했고, 완성된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순간 이제 중요한 것은 메시지기에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인물도 사건도 아닌 메시지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기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피해를 보는 구조입니다. 바비와 똑같이 장난감으로 만들어졌음에도 군집 행동하는 짐승들이나 다를 바 없는 모든 켄들은 의도적으로 무너지고, 모든 바비는 다 바비라는 영화의 주장은 모두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바비들에게서 서로 구분되는 개성을 필연적으로 빼앗을 수밖에 없게 되죠.
바비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켄들을 아둔한 마초로 묘사하는 것까지야 그렇다쳐도, 현실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음에도 마텔 사 경영진을 비롯한 실제 인물들까지 몰개성하다못해 장난감만도 못한 인간상으로 그려집니다. 엄마를 쳐다보기도 싫어하던 사춘기 딸과의 갈등은 마치 비싼 것을 구매했으니 딸려오는 부록마냥 스리슬쩍 해결되며 실로 게으른 마침표에 만족하죠.
하고픈 말에 정신이 팔려 무너지는 기승전결은 당연히 그레타 거윅의 명성이라면 설명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현실 세계를 포함한 이 모든 광경이 사실은 바비 인형을 통해 자아 실현에 다다르는 한 아이의 놀이일 것이라는 상상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본인이 원할 때만, 영화의 설득력에 경보기가 켜질 때만 장난감과 코미디를 핑계로 빠져나가는 것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가진 재료들의 장점이 발휘되려면 그 장점이 장점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뒤에 접근해야 합니다. 무작정 장점 자체만을 꺼내 쓰려고 하니 말이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반부 마텔 사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이나 최후반부 얼빠진 투표 장면이 대표적인데, 스크린 밖에 가하는 통렬한 일침은 자세 가다듬고 진지하게 들어주길 원하면서 그에 다다르는 과정은 장난감 영화에 뭘 기대하냐는 식으로 일관하죠.
이처럼 <바비>는 어떤 방식으로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기만 하면 목적을 다하는 영화였습니다. 주인공인 마고 로비의 바비마저 뒷전으로 밀려나는 순간조차 바비는 한 명의 바비가 아니라 모든 바비가 곧 하나의 바비이기에 괜찮다는 변명도 준비해 두었죠. 그 끝엔 이 각본으로 수용할 수 있는 총량을 한참 초과했음에도 들이부어 녹지 못한 메시지들이 공중을 떠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