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기회로 쌓아올릴 당신의 세상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가 2013년 <바람이 분다> 이후 10년만에 내놓은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요시노 겐자부로 작가의 1930년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지만, 일부 모티브가 되었을 뿐 소설의 줄거리를 그대로 옮기는 식의 영상화 작업이 이루어진 작품은 아니죠. 일본에서는 지난 7월 중순, 국내엔 약 3개월 뒤인 10월 25일 개봉되었습니다.
때는 2차 세계대전,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갑니다. 아버지가 데려온 새어머니, 낯선 보금자리,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까지 겹치며 혼란스러워하던 마히토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왜가리 한 마리가 나타나죠. 뒤를 쫓는 것도 모자라 말을 걸기 시작한 그 왜가리는 누구도 그 내막을 알지 못한 미지의 탑으로 마히토를 안내합니다.
마히토는 겉으로 보기에 크게 모난 곳 없는 아이입니다. 오히려 얼핏 보아도 있는 집에서 나고 자란 멀끔한 인상에 가깝죠. 낯선 사람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킬 줄 알고, 그런 번듯한 모습은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의 경계를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딱딱한 외면은 이미 일찍이 놓아 버린 세상과의 정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기댈 곳도, 바랄 것도 없어진 공허함의 증명이죠.
때문에 마히토는 여전히 악몽을 꿉니다. 화재로 사망한 어머니가 나오고, 자신은 그런 어머니를 구하지 못합니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절의 마히토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지금의 마히토는 어떤 상황이나 자극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하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 아버지가 데려온 새어머니와 이사를 가게 된 집, 전학을 가게 된 학교는 그의 내면을 휘젓습니다.
다 싫고 다 없어졌으면 좋겠지만 티를 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기에 자신은 이미 너무 컸습니다. 참다가도 이따금씩 비어져 나오는 충동까지 참을 수는 없습니다. 마침 동네 아이들이 멀끔한 도시 소년을 경계하고 싸움을 걸어 오니 잘 됐다 싶습니다. 적당히 맞은 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굵직한 돌멩이로 스스로 피를 냅니다. 이러면 여기가 싫다는 티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마히토의, 당신의 내면은 물과 같습니다. 바람이 불면 수면의 흐름이 이리저리 바뀌기도 하지만, 그 아래의 일은 웬만해서는 밖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물 속에서 약육강식의 살육이 벌어지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은 그저 절경일 수도 있습니다. 한때 힘차게 흘렀을 물은 갈 곳을 잃어 한 곳에 고이고, 이내 벌어진 틈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질 뿐입니다.
그런 물 위를 걸어 왜가리 한 마리가 찾아옵니다.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것도 모자라 이내 사람의 말까지 하는 이 왜가리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처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누구는 신화 속 인물처럼 묘사되는 큰할아버지가 지었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어느 날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신비로운 탑이죠.
탑 속 세상은 환상의 세계입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묘사할 수도 없는 존재와 법칙이 지배합니다. 집에서 자신을 돌보던 할머니가 젊은 몸이 되어 현실 세계에 생명을 올려보내는가 하면, 불을 다루는 소녀가 마법으로 펠리컨들을 물리치고 앵무새들이 왕국에서 권력에 도전합니다. 정리해서 적어 두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끊임없이 나열되죠.
여기가 바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평가를 가장 크게 가르는 지점입니다. 감상의 온도를 떠나 난해하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상영관 곳곳에서는 도대체 이게 뭐고 지금까지 뭘 본 거냐는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고, 즉석에서 이 장면은 이런 뜻이고 이 캐릭터는 이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토론 아닌 토론이 펼쳐지기도 했죠.
다양한 해석을 요하는 난해함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의 공통점이긴 했으나,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영화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과 영화의 기승전결은 이해가 되는 것을 전제로 상징과 은유를 확장했다면, 이번 작품은 마치 환상 속 교차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온갖 것들이 정신없이 몰아치죠.
난해함의 정도가 클수록 해석의 여지도 넓어집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들에서 자주 발견되곤 하는 환경 보호, 반전(反戰) 등을 시작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 애니메이션 업계를 빗댄 이야기 등 특히 이번 영화가 발을 뻗을 수 있는 영역은 독보적으로 넓죠. 물론 그만큼 영화의 기본적인 기승전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히토가 발을 들이는 곳은 가문의 공든 탑입니다. 큰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군 공간이기도 하고, 군수 물자로 지역 유지 수준의 재력을 과시하게 된 마히토 아버지의 사업이 될 수도 있겠죠. 개념적으로는 새로운 세대가 물려받을 수 있는 구세대의 업적일 겁니다. 맨땅에 벽돌부터 올렸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잘 가꾸어 만들었건 현재는 모두가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무언가죠.
그 곳은 바깥과는 다른 법칙이 지배합니다. 상식과 물리 법칙마저 거부하는 그 곳은 삶과 죽음이 갖춰진 그 곳만의 생태계를 갖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 키워낸 영혼들을 하늘로 올려보내 생명으로 이어지고, 그를 먹이로 삼는 상위 포식자가 있는가 하면 그 포식자를 물리치는 또 다른 마법적인 존재도 있죠. 다른 세상이지만, 그 곳만의 순리를 갖춘 하나의 세계로 기능합니다.
그 세계에서 키리코와 히미 등 마히토를 제외한 인간들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자신의 자리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약육강식에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듯, 이들이 행하는 살생이나 폭력은 이 세상이 유지되는 원동력의 일부죠. 처음 이 세상을 쌓아올리기 시작해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하지만,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치열한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조각을 맞춰 버린 이후라 이제 어느 곳도 되돌리거나 고칠 수 없어진 그 세상은 외부인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처음엔 세상의 건설을 도우려 들어 온 잉꼬들은 세력을 키워 주인의 자리를 넘보고, 그 주인의 목소리가 부른 후계자를 죽일 듯 경계하죠. 그러나 애초에 그 후계자는 모두가 선망하는 천국의 핏줄 왕좌가 아닌, 자신의 혈육이 아닌 존재를 위해 목숨을 던지려 합니다.
마히토의 시선에서 모든 것이 '그냥 그런 것'이라 고정되어 있던 그 세계는 알면 알수록 괴상하기만 합니다. 펠리컨들이 악한 존재로 취급받을 이유도, 산실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유지되는 세상이라면, 이렇게 해도 고작 하루하루 연명이나 하는 세상이라면, 게다가 그 세상을 이어나갈 유일한 희망이 스스로도 선을 자처할 수 없는 자신이라면 더욱 위태로울 뿐이죠.
고개만 끄덕이면 한 세상의 주인이자 신이 될 수 있음에도 마히토는 자신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찌됐건 그 세상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추었던 자신 또한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입니다. 상처를 낸 사람이 치료를 해 주어야 효력이 있는 그 세상의 법칙은 여기서 통용되지 않지만, 그 법칙 덕에 친구가 된 인연은 이 세상에서도 계속되죠.
스스로의 욕심과 통제하지 못한 감정은 흉터를 남겼고, 혹자는 그냥 머리를 길러서 그 흉터를 덮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히토는 그 흉터를 자신의 과거에 대한 증표로 드러냅니다. 잘못된 행동이었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나 덮을 수 없고 가려서는 안 됩니다.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흉터는 얽힌 사연이 다를지언정 낯선 인연과 생각지도 못한 교집합이 되기도 합니다.
겪을 당시엔 세상이 뒤집어질 것만 같던 커다란 일들도 지나간 뒤엔 서서히 잊혀집니다. 그러나 잊혀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잔잔해지고, 잊어버리면 잊어버리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해도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나의 오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모은 조각들로 쌓아올린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딱 하나뿐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