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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 리뷰

함께 받는 위안

by 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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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

(Green Book)

★★★★


시상식 시즌에 홀연히 등장해 강력한 우승 후보의 저력을 뽐내고 있는 <그린 북>입니다. 며칠 전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만 5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더니 각본상, 작품상, 남우조연상까지의 3관왕에 성공했죠. 그런데 <그린 북>의 작품상이 뮤지컬/코미디 부문이고, 드라마 부문에서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수상하며 모양새가 살짝 찜찜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린 북>은 아카데미 시상식도 기대해볼 만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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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는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운전수 면접을 보게 됩니다.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은 흑인에겐 녹록치 않을 미국 남부 투어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기사로 토니를 고용하죠. 그렇게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의 특별한 동행이 시작됩니다.


이렇듯 <그린 북>은 절대 가까워질 수 없을 것만 같던 두 남자가 서로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며 이내 진정한 벗으로 거듭나는 여정을 다룹니다. <언터쳐블: 1%의 우정>, <블라인드 사이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등 이전의 영화들에서도 몇 번씩 봐 왔던 그림이죠. 다만 인종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의 편견을 곳곳에 배치하고 대비하며 둘의 우정이 갖는 의미를 더욱 강화합니다.


절로 따뜻합니다. 짧은 식견과 앞서는 주먹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토니와 <스타 트렉> 시리즈의 벌칸 종족마냥 격식을 차리는 돈이 만들어내는 자잘한 에피소드만으로도 기본적인 재미가 보장됩니다. 맨손으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술집에서 시원하게 한 방 때리는(술도 주먹도) 광경도 흥미진진합니다. 두 주인공이 순간적으로 겪게 되는 고난엔 어느새 그들만의 해결 방식을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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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린 북>의 균형추는 조금 애매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얼핏 전혀 다른 삶을 살아 온 두 사람이 각자 삶의 빈 자리를 채우는 전개인 듯 하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토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상의 '완벽한' 인물입니다. 행동으로 보나 인맥으로 보나 암흑가에 발을 담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옳은 것을 판별하고 신념을 따를 줄 아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을 대표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백인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굉장히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가 저지르는 잘못은 기껏해야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훔치려다 돈에게 지적당하는 귀여운 일화가 전부입니다. 자신을 이입한 관객으로 하여금 극중 등장하는 '정말 나쁜' 백인들과는 자신을 차별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반부에 토니가 흑인 일꾼이 사용한 유리잔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후엔 그를 이어가거나 뒷받침할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운전수 면접을 보러 갔을 때 흑인인 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장면쯤은 보여줄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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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토니는 영화 내내 벌어지는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부터 남들과는 다르게 올곧았던 누군가가 그 올곧음을 몇 번에 걸쳐 확인받는 과정에 가깝죠. 정작 1인칭으로 전개되어야 했던 캐릭터는 돈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백인과 흑인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은 후반부가 되어서야 직접적으로 분출됩니다.


돈이 워낙 감정과 내면을 숨기는 인물인 탓에, 해당 장면 전까지는 영화가 돈을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그려내려고 했는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의연하게 견디며 자신의 명성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는지, 아니면 그저 흔들리는 인내심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보내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죠. 정작 그를 드러낼 만한 대부분의 말과 행동은 토니의 주먹이나 트리오 동료들의 입을 빌립니다.


물론 돈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토니를 가르치는 장면도 종종 나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쏠려 있는 균형추를 마치 쏠리지 않았다고 말하기 위해 넣었다는 (삐딱한)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나빴던 그때 그 시절에 사실 나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바로 그들이 남아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숨겨둔 듯 했죠. 미국의 시상식 심사위원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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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모든 것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출로 덮어냈다는 사실만으로 <그린 북>의 영화적 가치는 충분할지 모릅니다. 이런 감상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미화를 했다며 분노하기보다는 씁쓸한 웃음 한 번 짓는 데 그칩니다. 토니와 돈 사이에 생겨난 우정의 가치는 비단 과거에만 묶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러지 못했다면 현재와 미래라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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