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
본토엔 <The Mule>이라는 제목으로 작년 12월 개봉되었지만, 국내엔 왜인지 웅대한 제목으로 딱 3개월 늦게 개봉된 <라스트 미션>입니다. 무려 89세의 나이에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이죠. 거기에 브래들리 쿠퍼와 마이클 페나, 다이안 웨스트, 로렌스 피쉬번, 앤디 가르시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딸 앨리슨 이스트우드까지 이름을 올렸습니다.
젊었을 적 원예가로 이름을 날리며 백합 농장에 열과 성을 바쳤던 얼. 가족마저 등한시하기 일쑤였던 그는 결국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농장과 가족의 사랑 모두를 잃고 맙니다. 뒤늦게 가족의 품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만, 부끄러운 얼굴과 빈 손은 초라하기만 하죠.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되돌려 보려 얼은 마약 운반책이라는 부업에 손을 대고,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이 그의 앞에 펼쳐집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작품은 그의 인생 철학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그랜 토리노>가 대표적이죠. 격동하는 시대 앞에 꼿꼿이 서서 적응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흐름에 휩쓸리는 대신 자신만의 품격을 지키고, 그 품격이 지켜낼 만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내죠.
<라스트 미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은 인터넷이라는 신문물 탓에 평생을 바쳐 온 백합 농장이 압류당하고, 도로에서 흑인 가족을 도우며 '검둥이'라는 말을 아무런 악의도 없이 꺼내는 영감입니다. 이제 살 만큼 살았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기에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유일한 회한인 가족을 다시 얻을 수 있다면 누구에게 무엇이든 아무런 미련 없이 건네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로 품 속에서 총을 꺼내 쏠 수 있는 갱 앞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지만, 딸과 부인 앞에만 서면 시선은 갈 곳을 잃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뒤를 쫓는 마약단속국 요원 콜린에게 건네는 말은 짐짓 관객에게 직접 전하는 조언입니다. 나처럼 나중에 붙잡으려 발버둥치지 말고, 아직 손 안에 있을 때 잘 어루만져 주라는 새삼스러운 후회입니다.
요소요소는 꽤나 교과서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점부터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던 메시지를 향해 직진합니다. 가족부터 갱까지 모든 캐릭터들은 얼의, 이스트우드의 가르침을 위한 재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가 그대로 녹아 있는 미간이 여전히 놀랍도록 또렷한 목소리를 만나 눈과 귀를 파고듭니다. 고집 때문에라도 부탁이라고는 죽어도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온화함은 절대적인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종의 영화들은 구세대의 짬(?)을 무시하지 말라는, 옳음을 강제하는 접근으로 빠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라스트 미션>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합니다. 인간은 한 것보다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그 크기는 내리막의 경사와 비례합니다. 이스트우드는 나보다 젊은 당신들에겐 아직 기회가 충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엔 그렇게 주기적으로 들어 주어야 하는 뻔함도 종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