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무덤으로
슈퍼히어로 영화가 '애들 장난'의 연장선쯤으로 취급받던 그 때 그 시절, 호기롭게 등장해 당당하게 명맥을 이어 온 엑스맨은 어느새 이 바닥의 대선배님이 되었습니다. 꾸준히 새 배우들을 수혈하고 장르적 시도도 아끼지 않으며 시대에 발맞추었지만, 회사가 통째로 팔리며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죠. 이번 <다크 피닉스>는 <뉴 뮤턴트>와 더불어 이 혼란한 시기를 거쳐야만 했던 두 편의 시리즈 신작 중 하나입니다.
어린 시절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진 그레이는 자비에 영재학교에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합니다. 교수의 비호 아래 엑스맨으로 성장한 진은 어느 날 우주에서 구조 임무를 수행하던 중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죠. 죽었어야 정상인 사고였음에도 왜인지 넘쳐나는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되고, 그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동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진은 거대한 선택을 마주합니다.
이전까지의 프로젝트들과 마찬가지로 <퍼스트 클래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아포칼립스>까지의 3부작으로 깔끔하게 끝나나 싶었던 과거 시리즈가 네 번째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다크 피닉스>라는 제목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듯, 2000년대 3부작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뽐냈던 진 그레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죠. 제임스 맥어보이와 마이클 패스벤더를 필두로 한 기존의 출연진들도 모두 돌아왔구요.
영화는 <아포칼립스>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던 진 그레이와 그런 그녀의 곁에 선 동료들을 중심에 둡니다. 같은 돌연변이의 입장에서 누구나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개인의 초능력'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확대되며 모두는 이윽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죠. 대립각의 머리엔 또 한 번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가 자리를 잡고 있구요.
여기서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를 양쪽에 둔 대립각은 엑스맨 시리즈의 전통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다르게 태어난' 존재들이 보통이자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대표하기도 했죠. 강력하고 멋진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표방하며 소수자들의 전쟁과 평화를 내포했고, <엑스맨: 최후의 전쟁>은 이를 내버렸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크 피닉스>는 세계적으로 공인된 그 실수를 다시 한 번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신념의 대립은 망각한 채 CG에 CG를 비비는 데 정신이 없습니다. 집안 싸움으로도 충분한 각본에 외부인까지 집어넣습니다. 매력이 모자란 것을 넘어 각본에서 완전히 편집해 버려도 무관한 그 캐릭터에 제시카 차스테인을 낭비합니다.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도박이었던 소피 터너마저도 지금껏 시리즈를 책임졌던 배우들을 대체할 힘이 많이 부족합니다.
<다크 피닉스>와 <뉴 뮤턴트>는 제작 도중에 20세기 폭스가 디즈니에 인수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정확한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그러지 않아도 계속된 재촬영과 개봉 연기가 뒤엉키며 뚜렷한 결과 없이 제작비만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하죠. 초기 계획대로였다면 작년 4월에 개봉되었어야 할 <뉴 뮤턴트>는 지금도 재촬영이 진행 중이고, 이것이 엑스맨을 디즈니의 마블 유니버스에 집어넣으려는 계획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 상황입니다.
달리 말해 <다크 피닉스>는 본의 아니게 시리즈의 최종장 역할을, 그것도 촬영 중반에 갑작스레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죠. 언제나처럼 독립된 영화 반, 시리즈의 도개교 반을 섞으려던 찰나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준하는 무게를 안은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후반부는 초중반부와의 아귀도 맞지 않는 것은 물론 급히 셔터를 내리며 각 캐릭터의 행적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설픔까지 섞여 있습니다.
언급한 대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야 했던 프로페서 X와 진은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와 <아포칼립스>를 잊은 듯 철이 없고, 사이클롭스와 퀵실버 등 내한까지 했던 멤버들은 특별출연이라고 해도 믿을 비중만을 가져갑니다. 그 와중에도 마이클 패스벤더의 매그니토만이 유일하게 배우와 캐릭터의 힘으로 분투하지만, 따로 노는 전후반의 피해자인 것은 마찬가지죠.
반면 좁은 곳에서 복작대는 액션에 4DX는 뜻밖의 이득(...)을 보았습니다. 넓은 공간 대신 우주선 안, 열차 안, 집 앞 등에서 아기자기하게 부대끼는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간 덕이죠. 총을 쏘는 매그니토, 근접적에 특화된 나이트크롤러, 바람처럼 움직이는 퀵실버 등 어쩌다 보니 맞춤형 연출이 다수 등장합니다. 물론 액션씬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감안해야 하겠지만요.
하나의 영화로 놓고 보면 한정된 공간에서도 수십 명의 초능력자들을 등장시켜 끊임없는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노력이 가상하지만, 애석하게도 엑스맨 시리즈의 2억 달러짜리 마침표에 붙일 만한 수식은 아닙니다. 불과 2년 전 <로건>으로 규모나 때깔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시리즈기에 아쉬움은 더욱 큽니다. 20년어치 애정 덕에 박수는 치지 않을 수 없지만, 당연한 씁쓸함은 지우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