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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엉 Sep 06. 2021

달미와 도산이는 없지만

얼레벌레 스타트업 마케터의 일기 #1. 스타트업 종사자 김우엉



‘샌드박스라고? 그 샌드박스에서 만든 드라마인가?’ 드라마 ‘스타트업’을 보았습니다. 저는 스타트업 월급쟁이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뻔한 이야기 -군대에서 연애하고, 병원에서 연애하고, 조선에서 연애하는 K-드라마-인 것만 같아서 부정하였는데요, 그렇지만 드라마는 또 이런 허황된 맛에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태세 전환이 빠른 편)



너무 재미있어서 어느 주말 동안 5회를 몰아 보았고, 그 이후로 6화부터는 본방사수를 했습니다. 매 화 보는 맛이 났습니다. 스타트업과 관련된 단어로 부제를 삼아 극을 이끌어 가고요, 연출도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도산이, 용산이, 철산이, 이 삼산이들은 RGB 색깔로 옷을 맞춰 입고 다닙니다. 심지어 해커톤에서 CEO를 영입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달미가 너무 귀여워서 이불을 발로 뻥뻥 찼습니다.



모든 회차가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13화를 좋아합니다. '컴포트 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회차입니다. 어쩌면 스타트업에서의 매일은, 제가 정해 두었던 그 존을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름의... 나와 보니) 대기업에서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하고, 이직하면서, 스타트업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어쩌다 스타트업’입니다. 큰 회사에 다닐 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욕망이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고, 심지어 투명하게 다 비치기까지 합니다. 어느 날의 일기에는 ‘정글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고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일, 좀 다른 일, 나만의 일, 주도적인 업무를 해 보고 싶어서 스타트업에 온 것인데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제 눈 앞에 닥친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해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어떠한 ‘회사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단계가 아주 좋게 포장된 것이 스타트업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결국 어느 곳에 있던, 만족하는 내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구나’, 하면서 겸허해지곤 하기도 합니다.


"아웃 당할 수도 있지만, 홈런을 칠 수도 있으니 용기를 내어 배트를 휘두르고, 계란으로 바위도 쳐 보고, 와장창 깨지기도 하며, 꽁꽁 닫아 두었던 오르골을 결국 열어", 아주아주 근사하게 흘러 나오는 음을 들어봅니다. 이 안에서 계속 망설이기만 하면, 결국 나는 소심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패자가 되고 맙니다. 


스타트업, 업(業) 보다 역시 ‘사람’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스타트업은 아주 좋은 배경일 뿐,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곳에는 김선호 배우 같은 엔젤 없고, 남주혁 배우 같은 천재 너드 개발자 없고, 배수지 배우 같은 CEO도 없습니다. 하지만 좋은 동료들과 함께라서,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작은 성취들을 연결해 나가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열정이나 패기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도산이와 달미처럼요. 서로의 장점은 더 뛰어난 강점으로, 약점은 터닝 포인트로 삼아 극복할 수 있는 사이, 가까이 있다면 꽉 붙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현실은 뭣 같아도, 드라마는 이렇게 꿈 속 같아야만 합니다. 고층부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학창시절 편지의 주인공 따라 꿈을 찾아 창업해서 대표 되고,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께서 눈이 안 보이게 되시니, 기가 막히는 어플을 만들어 줄, 그런 천재 개발자가 내 옆에 있는, 아주아주 허황된 꿈 말입니다(개발자에게 물어보니, 드라마 보고 말하는 거라면... 그 질문에는 대답 안 하겠다고 하더군요). 


"20대잖아요. 좋던 팔자도 꼬일 때죠." 그리고 꿈 같은 드라마 속 현실적인 대사에 위안을 얻습니다. 아마 서른, 그 이상이었다면 스타트업에서 일할 생각 자체를 못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지.'하고 생각하게 될 때마다, 드라마 ‘스타트업’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다시금 살짝 입사 전의 느낌으로 설레게 되어서요. 



허세인지, 커진 꿈인지, 아직도 알 수 없는 그 어중간한 어디쯤에서, 또 다시 출근합니다. 스타트업으로. 같이 갈 달미는 없지만, 헤매도 좋으니, 지도 없는 항해를 떠나는 것도 괜찮겠다고 제 자신을 달래 봅니다. 


스타트업 종사자 분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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