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석의 사이다 같은 시원한 펀치와 무관심에 경종을 울린다
마동석의 강력한 펀치야말로 시원한 사이다
도시인들에게는‘방관자효과 ’또는 ‘제노비스 신드름’이라 불리는 군중심리가 있다.
1964년 3월13일 미국 뉴욕주 퀸스 지역에서 스물여덟 살 여성 캐서린 제노비스가 퇴근길에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35분간 이어진 범행으로 목격자가 38명이나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신고하지 않고 방관했다.
‘누군가 신고 하겠지?’ 라는 무관심과 이기심이 우려된다.
누구나 동네사람들이란 도시민과 달리 친근한 느낌을 가진다.
흉악해진 사회에 동네나 도심이나 카트라인이 따로 없다.
특히 이 영화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탐욕과 타락된 권력의 치부로 인해 불행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사람들과 기성세대를 향해 던지는 묵중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학교는 스승, 선생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르치는 교사, 직업인만 득실거린다고 한다.
이미 교권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일반 고등학교는 대다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자고 있다.
어느 누구도 깨우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이 모두 다른데 대학 입시로 경쟁을 위한 수업을 한다.
장기간 가출한 학생 담임선생마저 ‘종종 있는 일“이라고 신경 쓰지 않는다.
선생님들의 자존감이란 실추되어 있어 안타깝다.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실종된 학생을 찾으려는 체육교사(마동석역)에게 교감선생은
“당장 조사 중단하세요. 명령입니다. 수업료 걷는 일에만 신경 쓰시고”라고 생계를 위협하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학교이사장은 학생들을 위한 생각은 없고 오직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다.
욱하는 성질로 인해 권투 감독에서 파면 당한 경험도 있는 체육교사는
“제발 조용히 있으라는 ” 동생의 간곡한 요청에 주춤하지만 “선생님도 다치기 싫죠?”라고 말하는
유진(김새론 역)의 순수한 우정과 선생님으로서의 의무감에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미술교사(이상엽역)의 사이코패스는 교사들의 자질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교사가 되는 조건 1순위가 임용시험이라는 것에서 싸한 느낌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치권력과 경찰의 공권력에 관한 묘사는 보통 무능함과 부패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의 추한 모습과 자녀에만 올인 하는 잘못된 사랑을 경종한다.
‘정의가 밥 먹여 주나“ 라는 핀잔이나 ”남 들도 다 그렇다“는
좌절감을 유진의 행동으로 어른 관객들을 뜨끔하게 한다.
우연히 동네사람들이라는 친근한 타이틀에 이끌려 보게 되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핫한 영화임이 분명하다.
학창시절에 어떠한 불가피한 사유가 있더라도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벗어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기에 고등 학생들도 한 번은 관람하고 스스로 사고의 골격을 세웠으면 한다.
영화를 보는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현실성 있는 스토리와 액션을 좋아한다.
그런면에서 ‘동네사람들’은 관객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렸다고 보인다.
한국사회는 분노조절의 브레이크가 사라졌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가정 붕괴 범죄와 흉악한 범죄가 늘고 있다.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홀로 있으면서 도움조차 구하기 어렵다.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으로 인해 소외되고 취약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불만과 불신이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희망의 싹은 아직도 숨쉬고 있다.
별 볼일 없는 보통사람들의 정의와 도덕을 위한 몸부림의 결과
해피엔딩으로 끝나 다행이다.
아직 필자는 영화 보는 수준이 낮아선지 모르겠지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면 걱정, 상실감, 씁쓸함, 허무함도 조금 덜해진다.
행복은 환경이 만들어주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행복한 사람과 유대가 될 때 행복해진다.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