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이트 Aug 10. 2018

며느리가 말하는 가성비가 0인 관계

요즘 브런치에도 며느리 노릇의 억울함에 대한 글이 올라오고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딸만 둘 키우는 내 입장에서는 이런 움직임들이 바람직한 현상으로 반기고 있다. 나 역시 이십오 년 세월 동안 며느리와 올케, 그리고 아랫 동서 노릇을 하면서 부당하지만 딱히 꼬집어 밝힐 수 없는 무엇인가 심경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숨긴 채 늘 즐거운 듯이 지냈더니 시집 식구들로부터 '무던하다'라는 칭찬을 마침내 획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한 마디를 얻기까지는 겉으로 보기에 좋은 듯이 굴었던 나의 노력이 수십 년 들어 있다. 무엇보다 불화가 싫었고 남편을 사랑했기에 남편의 부모 형제에게도 최선을 다해 좋은 모습만 보이려 무척 노오력했던 세월이었다. 


그런데 참 부질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시집 식구들이 나를 좋아할 때는 내가 몹시 잘 할 때뿐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내 주장을 내세우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바로 날카로운 반격이 들어오는 걸 느낀다. 뜨거운 여름휴가에 시집의 형제들이 모여 일박으로 여행을 다녔는데 올해는 너무 더워 가을로 미루기로 했다. 작년에는 더운데 여섯 명이 한 차에 타고 다니는 여행이 부담스러워 나는 빠지기도 했다. 늦더위가 무서운 나는 시누이에게 꼭 가야 한다면 11월에 가고 싶다고 했다. 시누이는 "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요즘 네가 우리 집에서 갑 아니냐?" 이렇게 말했다. 


손위 시누이는 내가 완치 진단을 받자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그동안 내가 스트레스받아 재발할까 봐 말을 조심했는데 이제는 좀 편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떠보기도 했다. 내가 죽도록 노력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고 뭐든 양보하고 내줘야만 하며 조금이라도 불만을 말하면 순식간에 싸늘해져서 회복하기가 힘든 것이 시집 식구와의 관계인 것 같아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나 형편없어 가성비 0인 듯하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부터 형 집에서 형수가 싸주는 도시락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형수가 나이가 많아 힘들어서 명절에 우리 내외가 오는 것을 반기지 않게 되었다. 지방에 사시니 하룻밤 자야 하는데 주부 입장에서는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라서 나는 그걸 이해했지만 남편은 크게 화를 내며 내게 화풀이를 하여 해마다 명절만 돌아오면 싸웠다. 평생 손님 치르고 제사를 모신 형수가 늙어서 그런다면 그동안 고생했다고 이젠 좀 편히 지내시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시동생인 남편은 형집에 가고 싶은 자신의 의지만 가장 중요했다. 명절이 뭔데 가족이 모여서 함께 지내는 게 명절 아니냐며 무한 반복하는 논쟁에 정말 이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좋은 게 좋다고 늘 속이 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으니 (그러다가 정말 위가 없어져 버렸네?) 시누이는 암에 걸리기 전에 내가 그토록 힘들게 산 줄 몰랐다고 했다. 직장에 다니며 입맛 까다로운 남편과 아이들까지 돌보면서 살림을 하느라 끝없이 고단한 삶이었는데 성격이 활발한 내가 겉으로는 항상 즐거운 듯 웃고 다녀서 정말 즐거운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사실 인생이 진짜로 즐거워진 건 암에 걸리고 난 다음부터였는데 말이다. 


딸들은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한 나의 자부심을 와장창 깨부수며 엄마처럼 살까 봐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모든 집안일을 아빠 없이 혼자서 하고 시집 식구들에게 휘둘리며 고생하는 걸 보니 결혼이란 여자에게 불리한 제도이며 주부의 고달픈 일상을 살 자신이 없다는 게 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작 나는 살림을 좋아해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청소나 빨래를 하면서 풀었는데 딸들은 행복한 엄마의 모습보다는 힘들기만 한 나를 본 것 같다. 


우리 남편은 자라면서 보고 배운 대로 자신의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명절에 자신의 집에 먼저 가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의 부모 형제에게 최선을 다해 잘 하는 아내가 마냥 흐뭇할 뿐이다. 더 잘하라고 은근히 강요할 때도 있어서 그럴 때면 내 친구가 말한 대로 "경상도 남자에게서 뭘 바라노?'라는 말을 되새기며 참는다. 대화로 풀기엔 그 벽이 너무 높고 단단해서 이혼을 각오하지 않고는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 놓을 순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 너무 복잡한 시집 관계에 멀미가 나서 이 남자를 버릴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다.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어지는 시집 식구들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암에 걸려 지난봄에는 마지막 검진이라고 일 년에 한 번 있는 제사에도 안 가고 내 맘대로 살고 있다. 앞으로도 시누이 말대로 갑질 하며 그렇게 쭈욱 살아갈 거다. 


평생 을의 신세로 살던 나도 드디어 갑이 되었다! 만세~~

작가의 이전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더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