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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Aug 02. 2018

이 또한 지나가리라.. 더위

1994년 10월에 태어난 첫째가 그때 임산부였던 내게 더위가 어땠는지 물었다.  난 날마다 울고 싶었다고 말했다. 에어컨이 드물었던 그 시절엔 낮이나 밤이나 에어컨을 쐴 수 있는 건 출근길 버스 속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릴 땐 이를 앙다물고 내렸고, 퇴근 후 낮동안 뜨겁게 달궈진 아파트에서 베란다에 코를 내밀고 한 줄기 바람을 기대했으나 모기만 달려들 뿐이었던 그 더위를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마치 뜨뜻한 난로를 껴안고 있는 듯한 만삭 임산부였기에 한 달 보름 정도를 괴로워하며 여름을 보냈다. 찬바람 불며 열기가 꺾이고 나서야 딸은 태어났다. 딸은 94년에 태어난 친구들이 그 더위를 견디느라 성질이 괴팍하고 별나다는 말로 자신의 결점을 슬쩍 덮어가려고 했다. 고생한 건 난데 결론이 이상하였지만 어쨌든 그 더위에 자신을 뱃속에 가지고 있느라 고생했다고도 했다.


이듬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내게 큰집에서 에어컨을 사주셔서 이젠 아는 사람만 아는 골드스타표 우리 집 에어컨은 아직까지도 쌩쌩 잘 돌아가고 있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던 94년도의 더위에 비하면 낮에는 집 앞의 커다란 카페에서, 저녁에는 시원한 거실에 요를 깔고 누워 보내는 요즘은 마음만 넓게 먹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더위이다. 이 더위에 출근하는 남편과 첫째는 요즘 내가 가장 신경 써서 보살피는 대상이다. 입맛까지 잃어버린 남편을 위해서 아침상에 닭개장과 콩국물과 오이냉국을 한꺼번에 차려놓는다. 출근 일주일째인 첫째는 이제야 피로를 이기는 법을 알았다고 한다. 바로 힘을 빼는 것이었는데 사회 초년생이 그렇듯이 긴장한 나머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눈가의 다크서클이 시꺼먼 채로 출근하는 것이 짠했다. 만 원을 쥐어주며 퇴근할 때도 전철역까지 걷지 말고 택시 타고 오라고 했다.


이렇게 가족들을 돌보며 사느라 시골집의 농작물들은 노랗게 타들어가도 가볼 수가 없었는데 저녁에 갔다가 물만 주고 다음날 아침 버스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지경이 되었다. 살아 있는 식물을 말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손바닥만 한 텃밭과 잔디밭에 두 시간 동안 물을 주며 나무에도 물을 오래오래 주었다. 염천에 사람 돌보랴 작물 돌보랴 나도 한가할 새가 없다. 남편은 여름 방학 동안 학교의 보수 공사일을 한다고 주말과 휴가도 없이 이 뜨거운 날에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느라 가뜩이나 허약한 사람이 더위를 먹어 약국을 하는 여동생에게 처음으로 영양제 부탁을 해보았다. 심신허약자인 주제에 멋도 모르고 폭염에 공원 걷기를 계속했던 나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와서 지금은 가급적 야외 활동을 쉬고 체력을 아끼고 있다.


아파트 앞집에 사는 이웃이 십 년 동안 한살림 매장에 팀장으로 일하다가 지난달에 정년퇴직을 해서 요즘 이웃들과 어울려 함께 점심도 먹고 오후엔 카페에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낸다. 감자와 양파, 옥수수를 서로 나누어 먹으며 재미나게 지내는데 어제는 앞집에서 오이가 한 상자 들어왔다고 그걸로 오이소박이를 함께 담기로 했다. 씨가 없이 굵고 긴 오이라서 소박이를 담기엔 그만이었다. 피클로도 담고 오이지로도 담았으나 그래도 많이 남아 오이 40개를 4 등분하니 160개의 오이소박이가 만들어졌다.


나는 부추 두 단을 사고 앞집은 오이를 가져오고 양념은 십 층에 사는 솜씨 좋은 이웃이 손맛과 함께 거드니 우리 집에서 골드스타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어놓은 채 오후 내내 오이소박이를 만들며 즐겁게 보냈다. 뜨거운 소금물을 부어 오이를 절이면 끝까지 아삭아삭하다고 해서 한 시간 동안 절여둔 오이를 하나하나 행주에 꼭 짜서 물기를 빼고 양념을 넣었다.  




정성을 들여 담으니 맛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짜지 않고 맛있는 오이소박이가 되었다. 뭘 해야 식구들이 없는 입맛에 먹어줄까 싶어서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도 해보고 밭에서 딴 토마토로 퓌레를 만들어 스파게티도 해보는 등 식구들이 더위에 지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뜨거운 여름도 다 지나가리니 곧 추운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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