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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Jul 24. 2018

여수 밤바다는 덥고 습했다.

여행기는 내 글의 주제가 아니라서 안 쓰려고 했다. 하지만 3층 주택을 지어 이사한 동행 회원의 집을 방문한 이번 여수 여행은 특별했기에 지글지글 끓는 폭염을 뚫고 회원 네 명이 여수까지 가서 이틀 밤을 자고 온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네이버 암 카페 아름다운 동행은 전국에 회원이 있으므로 어디를 가도 현지인의 안내를 받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항암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면서 제주에서 강원도까지 누비고 다니며 곳곳에 있는 회원들과 어울려 보냈는데 춘천에 살던 회원이 여수로 옮겼다고 놀러 오라는 말에 네 명의 여자들은 바로 일정을 맞췄다. 백수의 힘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암환자가 되면 대부분 나처럼 경력단절 같은 상태로 몇 년을 놀고먹으며 오로지 투병에만 집중하게 된다. 완치 후에는 또다시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아 역시 어영부영 딱히 하는 일없이 지내다가 이처럼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두 말 않고 뜻을 합해 떠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요리에 능력 있는 상병과 산행과 바느질에 재주 있는 환희, 똑똑한 유학파 다살이 그리고 나까지 마흔 하나에서부터 오십 하나에 이르는 여자 넷이서 상병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수에 갔다.


여수의 신시가지 택지에 커다란 삼층 주택을 지어 작년 봄에 이사를 했다는 안주인은 집 짓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살이 쏙 빠져서 암이 재발한 줄 알았다고 했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직접 아시바( 일본어로 건물 외벽에 설치된 발판)를 타고 다니며 나무 외장재로 된 벽에 못질까지 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시바가 뭔지 아는 나로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비용을 아끼려 조명도 모두 직구로 구입하고 발품 팔아가며 여러 군데 견적을 받아보고 알뜰하게 지었는데 안주인의 오랜 친구가 건축가여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남편분이 주로 지낸다는 1층 서재에 책이 가득 쌓인 걸 보니 선비 같아서 건축가인 친구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집 지으며 눈퉁이 맞았을 것이다.


거실 창으로 여수 바다가 어렴풋이 보이고 널찍한 거실 천장엔 시스템 에어컨이 제습 기능으로 24시간 조용히 돌아가고 있어서 마치 호텔같이 안락한 분위기였다. (우리 집은 94년의 폭염을 겪고 95년에 산 에어컨이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형편이다. 제습 기능 따위는 없다.)


요즘 공간만 허락하면 웬만한 집에 다 있는 안마의자에 돌아가면서 앉아 안마도 받고 안주인이 수놓고 있다는 프랑스 자수를 구경하고 3층 작업실에 가득한 수제 인형이며 민화 같은 취미를 구경하느라 시간이 잘 갔다.  여수에 오면 먹어야 하는 먹거리로 하모(갯장어)를 빼놓을 수 없어서 샤부샤부로 먹고 구이와 탕으로도 먹으며 부족한 원기를 채우느라 입이 바빴다.


갯장어 샤부샤부


예로부터 여수에 오면 돈자랑을,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을,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안주인이 친하게 지내는 찻집이 집 앞에 있어서 커피 마시러 가보니 여수의 유지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요트를 태워줄 테니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온통 하얀색으로 입은 어르신은 여수 멋쟁이인 듯했으나 깔끔한 성격의 안주인은 단칼에 거절하며 요트 제안에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무시했다. 요트를 놓친 아쉬움은 유람선으로 대신했다. 유람선 이름이 미남이었다.


미남 유람선을 탈 수 있는 무료 승선권을 찻집 주인이 주셨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무덤이 있는 산을 깎아서 지은 집이라 가끔 밤이면 뭐가 휙휙 지나다녀서 안주인이 다니는 박수무당에게 물어보니 이 집터에 사는 총각귀신이라고 한다. 이훈을 닮고 체격이 좋다는 설명이다. 귀신과 놀기는 싫으니 쫓아달라고 무당에게 부탁했는데 아직까지 있다고 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에 잠이 안 와서 안주인과 내가 새벽까지 얘기하고 나머지 일행은 4시에 일어나 향일봉의 일출을 본다고 모두 나가버렸다. 3층 작업실에서 혼자 자려니 새벽이라도 어찌나 무서운지 불을 끄지 못하고 이훈 닮은 총각 귀신이 나타날까 봐 벌벌 떨면서 잤다.


요리를 잘 하는 상병이 있으니 집에 있는 재료만 가지고도 뚝딱 맛있는 상이 차려지고 입담 좋은 안주인이 있으니 심심하지 않고 손재주 좋은 환희가 썰어놓은 식빵 모양으로 수세미를 떠 와서 내가 뜬 수세미는 못 꺼내놓을 뻔했다.



냉장고를 털어 뚝딱 차린 게 이 정도이다.


체력이 달리는 암환자들이라 먹고 나면 다들 누워서 쉬다가 또 회복되면 일어나서 수다를 떨고 간식을 먹고 또 누워서 뒹구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바깥은 햇볕이 자글자글 끓고 있어도 쾌적하고 안락한 새집에서 편안히 쉬는 이번 여행은 무척 좋았다.  


동행 카페에 요즘은 글도 쓰지 않고 활동도 하지 않지만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아직까지 동행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여수에 간 김에 부산 친정까지 들러서 부모님을 뵙고 오느라 시골집의 텃밭과 잔디는 이 더위에 일주일 넘도록 물 구경을 못해서 돌보러 가야 한다.


나 없는 주말에 둘째가 친구들과 시골집에서 자고 왔지만 물을 듬뿍 주라는 나의 부탁에도 건성으로 뿌리고 밭에는 아예 물도 주지 않아서 분통이 터질 뿐 느긋한 둘째는 친구들과 밤새 에어컨을 켜놓고 잤다고 태연히 말한다. 시골집은 열대야가 없어서 얼마나 좋은데 시골을 모르는 친구들도 집은 예쁘다며 내년에 또 놀러 오겠다고 했단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친구들이 한 칭찬이라 믿기로 한다.




용문에 와보니 일주일 간 땡볕에 타들어간 작물들이 노랗게 말라 있고 목재 화분의 식물은 그만 세상을 하직한 것 같다.


마음이 급해 호스를 들고 정신없이 물부터 뿌리는 동안 어깨 팔 다리에 모기가 열다섯 방을 물었다. 텃밭과 블루베리에 먼저 물을 주고 잔디는 스프링쿨러를 끼워 오래 물을 주었다. 꽃밭은 아예 물을 틀어서 호스째 놓아 두었다.


올해는 토마토가 대풍일세~


터질 듯이 익은 토마토가 줄기가 휘어지도록 달려서 빨갛게 익은 것만 따도 한 소쿠리나 되었다. 이렇게 많이 수확한 건 처음이다. 땅콩도 작년만큼 잎이 무성한 걸로 봐서 실한 열매를 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밑거름을 충분히 못한 옆밭에 심은 옥수수는 키도 작고 줄기도 가늘어 딸 게 별로 없어 보였다. 역시 무슨 일이든 충분한 밑거름이 있어야 결과를 기대할 수 있나보다. 거름 없는 땅에 심은 고구마도 줄기가 약해서 순을 딸 게 없다.


서울의 열대야로 잠을 설친 남편은 여기선 새벽에 얇은 이불 두 개를 덮고도 추운지 잔뜩 웅크리고 잤다.


이것은 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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