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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서 만난 빨간 머리 앤

by 화이트

양평에서 시골 생활을 하면서 예술가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구옥을 가꾸며 <산새공방>을 운영하시는 캘리 작가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시고 동화 작가인 분도 생활 속의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인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한참 떨어진 그야말로 평범한 서민일 뿐이었는데 시골집에 살면서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를 실제로 만나 그들의 삶을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근검절약과 근면성실이 인생 최고의 미덕인 남편과 함께 살아온 나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는 예술가는 일상 속의 계산이 서툴다. 동화 작가는 나보다 더 산수가 안 되는 사람이라 계산을 할 때는 내가 한번 더 검산을 해주곤 한다.


물건을 살 때는 그 이용 가치나 기능을 요모조모 살펴서 값을 꼼꼼하게 따지는 전업 주부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아름다운 것에는 지갑을 여는 걸 서슴지 않는 것도 예술하는 사람의 공통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자기에 담아 을 함께 먹고 차도 같이 마시며 예술가들이 사는 공간에서 충분히 지내본 후에 나의 안목이나 취향이 한결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적 감각은 형편없기에 노력보다는 아마도 타고나는 게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동화작가는 시골집 마당에서 꽃을 키우며 하루하루 재미나게 지내면서 동영상으로 이런 재미를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나와는 시골 교회에서 만나 같은 나이로 친하게 지낸다.


어제 여동생이 영어 스터디를 하면서 <빨간 머리 앤>을 원서로 공부 중인데 번역하기 힘들다고 해가기로 한 숙제 부분을 찍어서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빨간 머리 앤>의 전집을 가지고 있고 여러 번 읽었기에 동생이 찾아달라는 부분을 바로 촬영해서 보내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앤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동화 작가와 앤이 무척 닮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마르고 큰 키가 일단 비슷하다. 호기심 많고 아름다움에 민감하며 어떤 목적이 있을 때는 무슨 일이든 야무지게 잘할 수 있는 점이 같다. 앤이 항상 나무나 꽃들을 보고 얘기하거나 아니면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동화 작가도 시도 때도 없이 허공이나 꽃에게 말을 건다.


-시냇물이 얼마나 즐거운 건지 아세요? 시냇물은 언제나 웃어요. 겨울에도 얼음 밑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요.


이렇게 말하는 빨간 머리 앤은 어느 때보다 요즘 같은 시절에 간절히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지만 반짝이는 기쁨을 찾고 아름다움을 응시하며 마음속의 종달새와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동화 작가는 책을 쓸 만큼 충분히 똑똑하고 어린이만큼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져야 동화를 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막연히 내 꿈이 작가였던 걸 생각하면 동화 작가는 좀 다르긴 해도 실제로 인세를 받는 작가와 사귀게 되어 나에게는 퍽 신기하고 기쁜 일이다.


어른이 된 앤처럼 이제는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거나 거창한 말을 늘어놓거나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생동감 넘치고 '내일은 무슨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기대하며 잠드는 동화 작가는 빨간 머리가 아닌 짧디 짧은 쇼트커트이다.


동화 작가는 입이 커서 어릴 적 별명이 '대구 *가리'였다는데 그 큰 입으로 활짝 웃으면 아무리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엄격한 사람이라도 단박에 마음이 풀려 마주 웃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집 책장에 있는 빨간 머리 앤을 양평 시골집에 가면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초록 지붕 집의 행운처럼 좋긴 하지만 앤의 막역한 친구 다이애나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캐릭터가 꼭 나인 것 같아 좀 시무룩해진다. 그러니 다이애나가 희고 발그레한 뺨을 가진 어여쁜 소녀라는 점에 최대한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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