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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다 늙으려고 그러는 거야.

과꽃은 이렇게 피었답니다.

by 화이트

시골집에 오면 커다란 거실 창으로 드넓은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그 아래 전깃줄도 여러 갈래 보인다. 도시에서 놀러 온 사람들은 다 좋은데 전깃줄이 너무 많아 거슬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시골에 안 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전기와 인터넷을 이용하려면 전신주와 전깃줄은 집 가까이 있을수록 유리하다. 외딴곳까지 연결하려면 개인이 전신주 세우는 값을 부담해야 하고 다섯 가구가 동시에 신청하면 무료로 해준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공중에 어지러이 걸려있는 전깃줄도 문명 생활과 직결되기에 보기 싫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시골에서 농사지어야만 먹을 수 있는 푸성귀 중에서 얼갈이를 솎아 겉절이로 무쳐 먹는 맛이 있다. 알싸하고 싱그러운 풋내가 아삭아삭하면서 맛있다. 워낙 연하기 때문에 금방 숨이 죽어서 텃밭이 있어야 이 맛을 볼 수 있다.


이번 봄에 처음으로 심어서 먹어봤더니 혀가 깨금을 뛰는 지경이라 가을에 다시 씨를 뿌려 키웠다. 남편은 금방 무친 새콤한 겉절이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시골에 오면 입맛을 다시면서 기다린다. 거기에 금방 딴 땅콩을 삶아 간식으로 먹으면 가을의 시골 재미는 이만한 것이 없다.


요즘 같은 시절에 시골집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몇 년 동안 농사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신선한 기쁨보다 당연한 노동으로 생각된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시작할 때 느꼈던 즐거움은 잊고 심드렁해지기 쉽지만 이런 심정을 말하니 이웃 언니는 "그거, 다 늙느라 그런 거야."라는 결론을 내렸다.


듣고 보니 내 나이가 오십 중반으로 딸들은 내 손이 필요 없도록 다 자랐고 오히려 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더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잡초 뽑다가 다친 왼손의 힘줄은 쉬이 낫지 않고 있다. 이젠 아픈 것이 자랑이라 사람들을 만나면 손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하게 된다. 몸이 약해지고 총기가 희미해지는 노년이 되면 즐겁고 기쁘게 사는 일이 어렵지 않을까?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한 번도 나의 노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슬기로운 노년 생활은 '즐거운 일을 찾아서 몰두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대상을 찾지 못했다. 좋아하는 책 읽기는 눈이 피곤해져서 오래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농한기인 겨울은 집안에서 주로 지내야 하니 손재주가 별로 없는 나는 할 줄 아는 일이 거의 없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기쁘지 않고 설레지 않는다. 정말 늙느라 그런 건지, 코로나로 그런 건지, 그냥 버티고 견디면 차차 좋아질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시골 교회에서 만난 이웃은 봄부터 마당의 잔디를 파내고 꽃밭을 만드느라 지금까지 삽질 노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꽃을 구해서 심고 가꾸며 동영상까지 찍어서 편집한다고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낸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런다지만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나도 앞마당의 잔디부터 파내고 꽃을 심고 싶지만 깔끔한 잔디 정원을 원하는 남편의 반대와 부족한 패기로 망설이고 있다.


'하루를 즐겁게 보내려면 목욕을 하고, 일주일을 즐겁게 보내려면 이발을 하고, 한 달을 즐겁게 보내려면 여행을 떠나고, 일 년을 즐겁게 보내려면 이사를 하고, 평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책을 읽어라.'


언젠가 읽은 이 글처럼 목욕을 좀 더 자주 하고 머리 손질도 부지런히 하고 그것보다 이사를 시도해야 하나? 이십 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가 울적한 기분의 원인인지 골똘히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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