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이 독립하고 나면 주부에게 찾아온다는 빈 둥지 증후군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어쩐지 섭섭하고 외롭고 자신이 별 쓸모없는 사람처럼 생각되자 직장인으로 열심히 달려온 내게도 똑같은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긴 은퇴한 지 벌써 7년이나 지났고 나 역시 전업주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빈 둥지 증후군이 오기는 틀림없이 왔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한가한 투정이 아니라는 걸 겪은 뒤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나를 밀어내는 딸들이 서운하더니 남편이 미워서 견딜 수 없다가 마침내 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설이 지나면 저 멀리 남쪽 바닷가로 떠날 거라는 선언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시골집은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암 카페 회원에게 세를 줄 계획이고 나는 혼자서 지낼 숙소를 알아볼 거라고 했다.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 나에게 주변의 상황은 떠나고 싶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나의 돌봄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딸들과 내게 배려가 부족한 남편에게 더 이상 최선을 다해 그들을 보살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건초염을 치료 중인 손목으로 설거지를 하려니 그릇을 놓쳐 깨뜨리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 살림에 자신이 없어졌다.
얼마 전부터 턱에서 소리가 나서 어제 치과를 갔더니 악관절 이상으로 수십 만원 하는 교정 장치를 끼고 자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악물기 때문에 턱뼈 사이의 디스크가 빠져나가고 닳은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거라는 설명이었다. 과로나 스트레스로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앙다물고 자거나 하기 때문이라는데 식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모두 하는 말이
도대체 집에서 노는 사람이 무슨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있다고?
강남의 잘 나가는 광고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첫째는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심한 지루성 두피염으로 머리의 반을 밀고 다니고 언니의 직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실내 디자인 일을 하는 둘째는 야근을 수시로 하니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야근한다는 연락에 디자이너 일이 힘들면 당장 때려치워라는 답장을 했다.) 건물의 시설보수일을 하는 남편은 준공을 앞두고 보름 가량 새벽까지 서류와 씨름을 한 건 맞지만 돈을 안 번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시를 하다니 내가 즐겁게 사는 게 그렇게 배 아팠단 말인가?
집에서 노는 나도 주변 지인들의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고 반복되는 집안일에 업무 스트레스를 받으며 은퇴가 보장되지 않는 부엌일의 캄캄한 전망에 절망을 느끼고 있다. 가족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느낌이 없어서 외롭고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낀 지 벌써 오래되었다. 이런 감정들이 풀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자 마침내 터지고 만 것이 나의 가출 선언이었다.
그런데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남편의 입에서 빈 둥지 증후군이 아니라 빈둥빈둥 증후군이 아니냐는 망언이 어젯밤에 나왔다. 올초에 시작된 가출 계획이 막상 실현하려니 막막하게 느껴진 게 사실이었는데 남편의 저 발언으로 인해 실천의지를 굳히게 되었다. 농담처럼 던진 남편의 말에 모두 깔깔 웃었지만 내 가슴에 비수를 꽂은 건 모를 것이다. 요즘 내게서 배워 개그감이 부쩍 늘어난 남편은 속으로 오늘도 한 건 했다고 아마도 뿌듯했으리라.
나도 내가 앓기 전에는 주변의 주부들이 겪었다는 빈 둥지 증후군을 우습게 여겼음을 고백한다. 심지어 자식에게 전부를 걸었던 어리석음의 당연한 결과라고 비웃었다. 나는 절대로 그런 나약한 감정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는 결코 모르는 것이다. 나는 빈둥빈둥 놀다가 빈 둥지 증후군에 빠지게 되었고 출구 없는 고민에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오십 중반이 넘은 이 나이에 아직도 바다를 바라보는 낭만을 꿈꾸고 혼자의 공간에서 오붓하게 생활할 희망에 부푸는 것이 주책이 아니라 감성이 되려면 발상은 충동적이었지만 차근차근 계획해서 꼼꼼하게 알아보고 실천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나도 양심은 있으니 가출하면 생활비는 안 받기로 했다.
로또 백억에 당첨되어도 조강지처는 절대 안 버린다는 저 옛날 남자랑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살아야 하니까 잠시 떨어져 숨 고르기를 하고 다시 내 인생의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