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파트에 머물고 있던 지난 수요일 저녁에 소나기 같은 비가 내렸다. 주민센터에 라인댄스를 배우러 가야 하는데 쏟아지는 비를 뚫고 걸어가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현관 신발장에서 가장 커다란 우산을 고른 뒤 이십 분 정도 비 속을 걸어가니 양말이 젖어버렸다. 여분의 양말을 챙겨 왔어야 되는데 맨발에 댄스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옷은 근처에 사는 동료가 준 반짝이 상의와 짧은 캉캉스커트로 챙겨 입고 그 위엔 긴 리넨 원피스를 입고 왔다. 취미 생활을 라인 댄스에서 탁구로 갈아탄 동료는 44 사이즈의 댄스 옷을 줄 곳이 없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며 까만색의 상의 4벌과 하의 3벌을 내게 줬다. 옷까지 갖춰 입으니 더욱 열심히 라인 댄스에 집중하게 된다.
다음 날은 바람이 불어서 춥기까지 했다. 이런 날은 밤을 주으러 가야 한다.비 오고 바람이 불면 밤이 수북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침 운동 겸 도서관에서 책을 두 권 빌린 후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부리나케 시골집으로 출발했다. 도착하니 점심 때라 샐러드 재료로 얼른 끼니를 해결하고 늘 가던 산책길을 나섰다. 산으로 난 인적 없는 길 옆에 밤나무가 있어서 작년부터 밤을 줍기 시작했다. 밤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자잘한 산밤이 열리는가 하면 밤송이 하나에 볼록하고 커다란 밤이 한 알씩 들어 있는 옥광밤도 있다. 나 같은 시골살이 초보는 작은 밤도 얼씨구나 하지만 이웃집의 고수는 씨알이 굵은 밤나무만 찾아다니며 줍는다. 물론 줍더라도 주인 없는 밤을 주워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잘해야 한 줌씩 떨어져 있던 밤이 작은 양파망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생밤은 밤껍데기가 반들반들 윤이 나서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알밤이 툭툭 떨어져 있는 걸 줍는 마음은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할 때 보물이 적힌 종이를 발견할 때처럼 기쁘다. 토실토실 알밤을 양쪽 주머니 가득 불룩 넣어서 돌아오니 산책과 밤 줍기를 같이 끝낸 마음이 모처럼 즐겁다. 영양이 많은 밤은 탄수화물도 많아서 나는 많이 먹지 못한다. 그래서 작은 밤이 더 반갑다. 하지만 큰 밤을 주울 때가 신나는 건 사실이다.
가을이 시작되는 시골은 정말 좋다. 봄이 가장 좋지만 시나브로 추워지는 시월의 시골은 혼자 조용히 지내도 고즈넉한 하루가 지나간다. 쨍쨍한 볕에 표고를 말리고 이불 빨래도 널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황토방의 창문에 창호지를 붙여야 하는 일이 남았다. 여러 해가 지나니까 한지가 삭아서 구멍이 숭숭 뚫려 뜯어낸 채로 여름을 보냈다. 시골집에서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문풍지를 바르는 일이었는데 드디어 볕 좋고 한가한 오후에 작업을 시작했다. 밀가루로 풀을 쑤고 창문에 덧댈 구절초와 한련화 잎도 따왔다. 마침 옷도 시골살이하면 방송에서 곧잘 입고 나오는 항아리 모양의 긴치마를 입었다. 하지만 끝나고 나니 풀이 여기저기 묻어서 바로 후회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진 않았다. 풀이 묻은 얇은 창호지는 찢어지고 대충 잘라 붙였더니 자세히 보면 길이가 안 맞아 순 엉터리로 마감이 되었다. 그래도 멋은 내보겠다고 창문에 꽃과 이파리를 눌러 붙이고 일을 벌인 김에 한지로 된 스탠드가 누렇게 변해 그것도 새로 종이를 발랐다. 게으른 내가 가을날 긴긴 오후를 보내기엔 적당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당뇨 진단 전에는 시골집에 혼자 있으면 식빵 한쪽을 구워서 커피 믹스와 먹거나 과자로 끼니를 때운 적이 많았다.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지 않아도 되니 간편한 방법으로 끼니를 해결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는다. 쌈채소와 과일을 사 와서 아침엔 샐러드와 달걀과 통밀빵으로 늘 먹던 식단을 유지한다. 점심과 저녁은 현미밥에 국이나 찌개와 나물로 야무지게 차려서 먹게 되었다. 당뇨식을 처음 시작할 땐 서울집에서 음식을 한가득 싸들고 와서 먹었으나 이젠 능숙해져 밭에서 나는 농작물로도 너끈히 상을 차릴 수 있다.
고구마순을 삶아 새콤하게 무치면 쫄깃한 식감이 맛있다. 볶아서 먹기도 하지만 고춧가루와 식초를 넣고 무치는 편이 간단하다. 호박잎을 따서 된장찌개에 넣어도 된다. 텃밭의 쪽파와 부추로 통밀가루를 넣어 전을 부치고 맵지 않은 풋고추는 금방 따서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 시골 밥상으로 상을 차려 먹으면 요즘처럼 식비가 비쌀 때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시골 살이가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아 뿌듯하다.
시골 교회에서 만난 어떤 부부의 얘기를 들으니 겨울이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서 전세 기간이 끝나면 가로등이 있는 번화가로 나가 살고 싶다고 했다. 면사무소가 있는 아파트로 옮길 거라는데 마당도 농사도 풀 때문에 힘들고 무엇보다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어서 겨울을 지내는 게 어려웠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부인의 치병을 위해 깊숙한 시골집을 얻어 이사를 오고 보니 미처 적응할 새가 없었던 것 같다.
마음의 준비 없이 시골 살이를 시작하면 이처럼 생각지 못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해만 지고 나면 깜깜한 시골의 겨울밤은 정말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산골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서 자기까지 긴긴 시간을 티브이나 보면서 소일해야 하니 도시의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은 조용하기만 한 시골이 견디기 힘들다.
여행에서 돌아온 딸들은 자기들끼리 생활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고 남편은 아내 없이 지내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나는 봄가을의 좋은 계절엔 이렇게 휴가처럼 시골집에서 혼자 지낸다. 홀로 있어도 끼니를 잘 챙겨 먹고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게 된 나는 이제 시골살이 초보가 아니다. 이웃 아저씨가 자세히는 가르쳐 주지 않은, 굵은 옥광밤이 열리는 주인 없는 밤나무를 어제저녁 산책길에서 마침내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