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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r 27. 2017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양평 집 뒤뜰에 꽃밭을 가지게 되자 가장 먼저 심은 것은 아파트에서 키우던 엽란이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들여왔던 엽란은 커다란 화분이 꽉 차도록 가득했던 뿌리를 드디어 땅에 자리 잡게 되었다. 넓은 이파리만 너풀거린다고 속으로 흉봤던 엽란이 알고 보니 보라색 조그만 꽃을 땅바닥에 피우고 있었다.


무거운 화분을 들어 옮기고 화분과 굳건하게 한 몸이 되어 있는 뿌리를 겨우 들어내어 땅에 심으니 좁은 화분에서 발을 못 뻗고 오그리던 엽란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시원해졌다. 따뜻한 베란다에서 자라던 엽란이 추울까 봐 바위 담장 아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아 줬는데 바뀐 환경에도 잘 적응하기를 엽란에게 중얼거렸다.


나무로는 라일락과 수국, 구근 식물로는 수선화, 아이리스, 칸나, 무스카리, 상사화 등을 이웃으로부터 얻어왔다. 그 밖에도 마가레트 등 몇 가지 더 있으나 이름을 잊어버렸다. 원예에 각별한 취미가 있고 마음씨가 좋은 이웃을 두면 이렇게 횡재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던지 헛웃음만 실실 나왔다. 이웃이 번식한 꽃을 파주는 걸 얼른 담아와서 순식간에 자리 집아 심어줬다.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호미질을 했더니 오늘 아침에는 팔이 쑤신다.


얻어올 땐 너무 많아서 그만 됐다고 사양했는데 콧구멍만 한 화단에 심어보니 별로 무성하지 않은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화초들에게 물과 영양분을 잘 주고 정성껏 키워 다른 사람에게 분양해주는 날이 오기를 상상하면서 거실에 앉아 뒤쪽의 창으로 노란 수선화를 쳐다보니 어찌나 좋은지 엉덩이가 절로 씰룩거렸다.


바쁠 땐 꽃을 모르고 살았는데 내 손으로 꽃을 심고 가꾸는 날이 올 줄이야! 인생은 알 수 없다더니 꽃밭을 가꾸게 된 것이 이렇게나 근사하고 멋진 일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야생화를 좀 더 심고 거름도 주고 무엇보다 공부가 더 필요해서 텃밭과 정원을 가꾸는 카페에도 가입했다. 가입 인사에는 농사보다 섬세한 꽃 가꾸기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사 년 동안 정들었던 암 카페를 떠나 신입회원으로 왔으니 잘 부탁한다는 쑥스러운 글을 남겼다.


처음 암에 걸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암 카페였다. 그것뿐인가. 평범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올리고 정다운 회원과 공감했던 카페였는데 다큐 앎이 방송된 이후에 수많은 신규 회원들의 사연이 올라오고는 오래된 회원들은 어느 결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래도 한번 정들었던 사람들과 묵은 정은 깊어서 지금도 가끔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챙기곤 한다.


시누이는 나보다 훨씬 꽃 가꾸기에 대한 취미도 있고 손재주도 있는데 어제 함께 작업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같이 가자고 했더니 딱히 일할 것이 없으면 안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남편과 둘이 왔는데 또 다른 이웃에게서 야생화를 좀 더 얻기로 했으니 다음 주말엔 시누이와 함께 가서 꽃을 심으면 아마도 무척 기뻐할 것이다.


흙을 다루고 풀을 만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즐거움을 준다. 예전에 살던 전셋집의 꽃밭에 심어뒀던 딸기 모종을 캐와서 남편에게 심으라고 이르고는 나는 쑥을 캐러 집 근처 언덕에 갔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쑥을 하나씩 캐고 있으니 머리 위에선 이름 모를 새가 맑은 소리로 지저귀고 상쾌한 공기에 흙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향긋한 쑥국에 넣을 쑥을 캐는 동안 짧지만 온전한 행복을 느꼈다.


쑥을 한 바구니 캐오니 고관절이 인공 뼈인 남편은 쭈그려 앉지도 못하고 허리를 굽힌 채 딸기 모종을 다 심어놨다. 마침 다 심고 나니 딱 도착했다고 구시렁댄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쑥국을 끓여주니 잘만 먹고 가는구먼!


그리고 어제 남편이 낮잠자는 동안 옆 농장 할아버지가 우리집 물을 잘 썼다며 나무 열 그루를 종류대로 주신다는 걸 내가 아니라며 앵두와 감나무 두 그루씩만 달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남편에게서 구박을 받았다.


주시는대로 받지 심을 곳도 충분한데 왜 그랬냐고 하는데 같이 낮잠자다 깨서 정신이 없었다고 겨우 변명했다.


다시 "아니예요. 열 그루 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쳤는데 내 주변머리론 어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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