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야 해
초등학교 재학 시절, 엄마는 글짓기가 좋았다. 교내 글짓기 대회는 엄마의 독차지였어. 상장이 쌓여갈수록, 그만큼 자신감도 높아졌지.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글짓기는 엄마의 자존감과도 같았다.
4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기 초에,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당시 엄마의 반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 글짓기 반 담당 선생님이셨다. 글짓기로 선생님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싶었던 엄마는, 재미있는 여러 가지 다른 동아리들을 마다하고 우리 반 선생님이 담당이신 글짓기 반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여자 아이가 엄마랑 똑같이 글짓기 반을 선택했다. 엄마는 그 아이에게 묘한 경계심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왠지 엄마의 자리를 위협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
주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주어진 시간 안에 원고지에 글을 쓰라고 하셨다. 그리고 발표를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는 그 여자 아이의 글솜씨가 궁금했다. 다른 친구들이 발표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글쓰기를 이어가던 여자 아이를 향해, 선생님이 발표를 해보겠냐고 물었다. 완성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 아이는 해보겠다고 일어섰다.
엄마는 그 여자 아이를 보고 두 가지에서 자존심이 상했다. 첫 번째는 원고를 끝내지도 못했으면서 여유 있게 생긋 웃으면서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만약 엄마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끝내지 못한 원고를 발표하기 무서워 쭈뼛쭈뼛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글짓기 상을 휩쓸고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두 번째는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한데, 그 여자 아이는 원고지를 넘겨가며 발표를 하다가 후반부에 들어서 빈 원고지를 넘기면서 말을 이어갔다. 마치 자신이 쓴 글을 읽어가듯 말했지만, 엄마는 알았다. 엄마의 자리에서, 그 여자 아이의 넘겨지는 빈 원고지가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 아이는 자신의 발표를 굉장히 자신 있게 마무리 짓고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물었다. “마지막은 즉석에서 지어서 말한 거지? 대단하네~”
엄마는 그날 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아이가 넘겼던, 아무 글씨도 없던 빈 원고지가 정말이지 충격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생각했다. 나는 글짓기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고.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너는 엄마를 보며 큰 소리로 울었다. 사실, 엄마가 좀 창피할 정도로 울었다. 넌 몰랐겠지만, 옆에서 기다리던 엄마들이 다 쳐다보았고 한 할머니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엉엉~ 나 미술대회 상 못 탔어~~~”
“너 어제 바른 글씨 쓰기 대회 상 받았잖아? 어제 다른 거 상 받아서 그래. 1학기 때 미술 상 받았잖아?”
아이들에게 상장을 골고루 나눠주려는 선생님의 노력을 아는지라, 무덤덤하게 너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때 어릴 적 글짓기 반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올라서,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유치원 때는 반 친구들 모두 너를 Artist라고 불렀고, 선생님도 수업 시간에 종종 너를 칠판 앞으로 불러 그림을 그려달라며 도움을 청하곤 했었지. 친구들도, 친구들의 엄마들도, 선생님도 모두 너의 그림 실력을 칭찬했어. 너도 곧잘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아빠를 힘들게 했다. 화가라는 직업이 너를 힘들게 할까 봐 말이지.
엄마는 창의력을 키워준답시고, 일부러 너를 미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유치원 시절 동안 정말 자주 미술관을 찾았고, 너는 집에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스케치북에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저는 미술 학원 한 번도 다닌 적 없어요. 저는 나중에 아티스트가 될 거예요!”
이런 말을 달고 살았던 너에게, 그 전 날 바른 글씨 쓰기 대회 상이 무슨 상관이었을까. 너에게 중요한 것은 미술에 대한 자존심이었던 것을.
1등 친구의 그림을 보니, 엄마가 봐도 확실히 잘 그리기는 했더라고. 너는 아직 물감 사용이 서툴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친구는 물감으로 명암도 줘가며 잘 그렸더라.
너에게 미안해졌다. 쓸데없이 엄마가 괜히, 창의력 운운하며 학원을 안 보내서 소위 ‘스킬’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사실, 수학 학원도 보내야 하는데, 그러면 또 논술 학원은 어쩌나 귀는 팔랑팔랑 선택은 갈팡질팡하던 시기였거든. 그런데 엄마는 이틀 고민하고 당장 다음 달부터 너를 미술 학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당시 엄마가 ‘나는 글짓기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던 시절을 혹시라도 네가 답습하게 될까 싶어서.
그런데 말이지. 이런 일은 수없이 생긴다. 엄마가 당시의 기억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던 순간이라 그래. 그런데 그 이후에는 그런 느낌을 하도 많이 받아서 기억도 안 나.
항상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야. 그런데 4학년이었던 엄마는, 처음이라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고 부끄럽고 그래서 그냥 ‘나는 못하는구나’ 하고 상황을 종료시켰어. 그런데, 이제 40살이 넘은 엄마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 안 해.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야. 능력을 의심받는 순간이 아니라, 내 능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터닝 포인트를 만난 거지!
회피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결과물도 꼼꼼히 쳐다봐.
그래야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어.
물론, 어린 너는 샘도 나도 질투도 나겠지.
억지로 다른 사람의 것을 쳐다보려면, 그래서 용기를 내야 해.
용기 있는 사람만이 최고가 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