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버린 후의 자아실현

by Kim Ji Youn

10여 년 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소위 대기업에 입사를 하게 되었지만, 매일의 출근길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사회에 적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힘든 것이라며 위로했지만, 어리버리하던 사회 초년생은 점차 힘든 원인을 '적응'이 아닌 '담당 업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꿈꿔 왔던 것과는 다른 일이었고, 흥미가 없는 작업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현실에 내 기를 다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이직을 결심했다. 입사 2년 반 만의 일이었다. 이제 막 20대 중반을 벗어난 나이에 이직이 조금은 겁나기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답시고 작은 회사로 옮기고자 하는 어린 사원을, 팀장님은 잘 이해하지 못 하시는 것 같았다. 팀장님과의 몇 번째 면담이었을까. 팀장님은 사람이 왜 일을 하는지 아느냐고 물으셨다. 20대의 나는 이게 왜 질문인지 이해가 안 갔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아실현이요


하지만 팀장님의 답변은, 당시에는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야


생각해 본다.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나보다 십수년이나 인생 선배이신 그분에게, 일을 하는 목적이 자아실현이라는 20대의 답변이 얼마나 철없는 얘기로 들리셨을까. 아직 두 돌이 안된 아이와 낑낑대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매우 현실적인 30대 주부가 된 나는 이제는 팀장님의 답변에 한 표를 던진다.




왜 일을 하는 목적이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했을까. 당시에는 원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야 말로 꿈을 이룬 것이고,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직업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야무지게도 자아실현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던 나는 현재 ‘당시의 꿈’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앞으로도 '당시의 꿈'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원하던 일을 더 이상 하고 있지 않은 나는 자아실현이 어려운 걸까? 다행히도, 분명한 건 오랫동안 일을 한다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팀장님 역시 일을 하는 이유가 자아실현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하셨으니까. 조금만 눈을 돌려봐도 그렇다. 매일매일 출퇴근하는 회사원들 역시 일을 즐거운 자아실현이 아닌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를 위해, 노후준비를 위해, 집 마련을 위해, 아이 교육을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도 출근길에 나선다.


어린 시절에는 쉽게 꿈을 품었고, 꿈을 실현하겠다는 더 큰 꿈을 꾸었다.

더 많이 배우고 아는 것도 많아졌는데.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자아실현의 꿈은 어디로 갔을까.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친다는 것은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인데, 실은 원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 버린 후다. 우리는 책임져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아졌다. 기대치에 부응해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어린 시절의 꿈은 잠시 2순위로 밀렸다. 어쩌면 다시는 1순위로 돌아오지 못할 2순위일지도 모르겠다.


자아실현의 정의를 한번 '행복'이라고 바꿔보기로 한다. 어차피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것도, 꿈을 이루겠다는 것도 모두 행복하고자 하는 바람일 테니 말이다.


행복하기 위한 조건들은 각자 다를 것이다. 그리고 내 위치에 따라 바뀔 것이다. 아이의 소리 없는 미소가 큰 웃음소리로 들리는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것이 새로운 행복의 조건으로 추가될 수 있다. 아이를 위해 멋진 엄마가 되어야지,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어야지 하는 다짐 역시 행복 조건으로 떠오를 수 있다.


아이가 따라 하고 싶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야 말로 좋은 교육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에서, 아이에게 동기부여의 수준이 아닌 여러 가지 사교육을 주입하는 것은 자아실현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현재 '과거의 꿈'을 실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아실현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행복을 위해 계속 움직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나에게 자아실현 중이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네, 그럼요!
이전 06화내가 제일 잘 아는, 중심이 되는, 배려받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