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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Mar 14. 2017

소소한 그릇 수다

그릇 욕심이 없는 편이었다.


10년 차 유부녀가 되도록 요리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탓에, 주방에는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접시 하나 없었으니 말이다. 결혼하면서 선물로 받았던 고급스러운 색감의 찻잔들은, 혼자만 있을 때는 이용하기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고이 모셔놓았다가 손님이 올 때에만 꺼내놓곤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모습을 드러낼 일이 거의 없어졌다. 다시 닦아 상자 안에 담는 과정도 귀찮아졌던 것이다. 이러다가 아이가 결혼할 때 선물로 물려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사은품으로 받은 쟁반이나 컵, 접시도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데, 굳이 디자인을 골라가며 예쁜 것을 사야 할 이유가 무엇이람.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우아한 취미를 알게 되었다. ‘포슬린 아트’라는, 백색의 접시에 페인팅을 하는 작업이었다. 공방의 강사가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히 펜을 쥐어 볼 용기조차 나질 않았다. 그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펜을 잘 못 다루기라도 했다간, 접시 하나를 통째로 버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포슬린 아트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일 뿐 직접 해 본 적은 없다. 강사인 그녀와 여러 번 만나 얘기할 수 있는 기회만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이 깊었던 이유는, 평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소소한 것들에 스며든 정성을 알게 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녀는 먹는 행위에도 센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접시에 무작정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접시 하나, 컵 하나에도 어떤 음식이 어떻게 담기는가에 따라 그림의 위치가 달라졌다. 마찬가지로, 접시의 페인팅에 따라 음식이 놓여지는 모양도 달라져야 한다. 음식과 접시의 색감 배치 역시 손이 가는 음식이 되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요소가 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음식 준비가 굉장히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아들도 이제는 이러한 정성을 이해하고 곧잘 따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식탁을 차리는 과정은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량감마저 안겨주는 달콤한 수다의 조건에는 맘에 맞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겠고, 분위기에 맞는 배경 음악도 옵션으로 깔아주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SNS에 자랑하고 싶을 법한 플레이팅의 음식이 시각을 즐겁게 해준다면, 접시가 비워지기 전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는 이어질 것이다. 식탁을 꾸미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는 것이라고는 ‘아, 예쁘다!’라는 말 한마디뿐 일지라도, 그 시간을 더 가치 있게 꾸며준 요소임이틀림 없다면 충분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차피 칭찬받고자 하는 행동은 아니다. 나만 아는 정성일지라도 말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이미 즐거움을 만났다.


한 선배가 결혼을 했다. 뭔가 색다른 선물을 전달하고픈 마음에, 동네의 도예 공방을 찾았다. 작은 소주잔 10개와 작은 안주 접시 10개를 주문했다. 소주잔과 안주 접시는 제아무리 10개씩이라고 한 들 부피가 클 수 없는 물건들이다.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10개 모두 제각각인 모양의 컵, 접시들이 얼마나 의도된 것인지 그리고 노력과 시간이 얼마나 들어간 것인지. 그래서 이렇게 준비한 마음을 알지 못할까 봐, 선물을 전달하기 전부터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마음 때문에, 그 잔에 그리고 그 접시에 음식이 담겨 진행되는 수다는 분명 오래 갈 것이라는 거다. 선물을 준비한 마음과 작품을 만든 도예가의 정성이 나만 아는 것일지라도, 어떤 선물을 주면 좋을지 생각하고 주문하는 과정에서 나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만의 시간에도 그 정성을 즐거움으로 풀어보고자, 간단한 식사 시간이나 작은 티타임부터 플레이팅에 신경을 써보기로 했다. 


평소에는 소홀했던 식사 시간이 근사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늦은 아침을 혼자 먹어야 하는 경우에도, 몇 가지 없는 반찬이나마 조금씩 접시에 담아 나란히 배치를 하고 밥 한술 뜨자니 대접받는 느낌이다. 늦은 밤, 안주거리 몇 개 없는 맥주 타임에도 눈 앞에 예쁘게 세팅된 접시들을 빨리 치우는 것이 아쉬워서라도 대화가 길어진다.


우리네 엄마들이 유독 그릇 욕심을 냈던 이유는 이래서였던 것 같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정성이, 한 끼의 식사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그릇의 등장이라는 식탁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가족들이 가끔은 서운했을 것이다. 때로는, 여러 그릇 세트를 구입하고도 숨겨두었다가 하나씩 꺼내놓았을 따뜻하면서도 귀여운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간다.


하루를 보내며 정성을 쏟는 일이 어디 플레이팅뿐이랴. 정성을 쏟았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 투성이다.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도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것은 기본적인 본능이거늘, 내가 들인 노력이 없던 일처럼 되어 버릴 때 그 심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먼저, 스쳐 지나갈 법한 상대방의 노력을 의도적으로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꼭 얘기해주려 한다. 적어도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듯한 노력의 시간이 지금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계속 쌓여가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웃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게다가 그렇게 쌓여간 시간들은 모두 철저히 본인의 것이라는 것도 얘기해주고 싶다. 


오늘, 나만 알고 있는 컵을 설거지한다. 그리 비싸지도 않은 컵 두 개일뿐이다.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도, 새로 샀는지 원래 있던 컵인지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모를 것이다. 노트북 앞에 앉아 이 컵에 가득 담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두 손 지긋이 감싸고 있노라면, CF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듯한 포근함이 밀려온다. 머그컵 하나가 나에게 주는 감동은 이렇다. 그래서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할지라도 남편에게 그리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지인에게는 꼭 이 머그컵에 따뜻함을 담아 전달해주고 싶다.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정성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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