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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i Youn Jan 03. 2018

잘하는 것과 빠른 것

느리게 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여유

매우 오래 전의 영화이지만 OST CD를 지금도 가끔 들을 만큼 애정을 갖고 있는 ‘샤인 (Shine)’은 데이비드 헬프갓이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샤인'은 피아니스트의 일생을 다룬 만큼, 많은 명연주들이 등장하며 귀를 즐겁게 한다. 이 영화를 보던 시절, 즉 그 무섭다는 중2병의 시절을 지나고 있던 나에게 가장 감명깊게 다가왔던 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데이비드 헬프갓은 이 곡을 연주하다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만다. ‘이 지경’에 이를 만큼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아붓고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감히 나 같은 범인은 이해하지 못할 심오한 예술의 세계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한데, 존경한다는 이 마음은 지금 이 나이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기 때문에 느끼게 된 감정이다. 그 당시, 복잡한 사춘기의 감정들 가운데 무엇인가 자랑하고픈 욕구는 주인공의 현란하고 빠른 손가락에만 주목했으니 말이다.


엄청 빠르다. 멋지다. 잘한다.


건반을 제대로 깊이 누르지 못하고 스르륵 훑고만 지나가게 되더라도, 무조건 빠르게 쳐보고 싶었다. 심지어 빠르게 연주하는 곡이 아닌 경우에도 말이다. 그야말로 허세 작렬의 연주에 혼자 도취된 나머지, 느리게 쳐야 하는 곡은 쳐다 보기도 싫었다. 악보에 그려져 있는 온음표는 어쩔 줄 모르겠는 시간을 요구했다. 메트로놈이 똑딱똑딱 이렇게 겨우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시간조차 지루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혹여 내가 보지도 못하는 사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던 허영심의 연주를 들을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부끄러운 감정을 전달하고 싶다.


허세, 허영이 크게 자리 잡았던 어린 시절이랑 지금이랑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 하게도.


빠름은 곧 잘함이다.


진도가 빠르면 잘하는 것이고, 빨리 치면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빠르게 잘하는 모습 말이다. 다른 것도 아닌, 그저 내가 빨리 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남겨져 있음에 기뻐해야 하다니.


선행학습을 했다는 것은 그저 먼저 배웠다는 것일 뿐 영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요, 가고 싶은 장소에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한 들 다른 사람들도 곧 도착하게 마련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수준임에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결과물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빠르게만 연주하고 싶던 어린 시절의 피아노 연주를, 이제 와서 돌이켜 본다. 느린 연주야 말로 현란하게만 보이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낼 수 있는 연주라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이 멈춰있는 시간이 불안하다면 하수일 테니 말이다. 진정 고수라면 손가락이 멈춰있는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스스로 그 음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테고, 그 능력은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 또한 답답함이 아닌 여유 있는 상태로 만들어줄 테니 말이다. 


나이듦이 아닌, 연륜이 여유와 느긋함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그 여유와 느긋함은 ‘비교적’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할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오랜 경험으로 인한 숙련된 실력은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내 능력을 내세우지 못해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괜한 걱정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느리게 갈 수 있다. 


빠름을 동경했던 그 철없던 소녀는 이제 여유를 동경하는 나이가 되었다.

느림이야 말로 진정한 실력자가 행할 수 있는 행동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것을 빨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아닌, 무엇인가를 진짜 잘 하고 싶은 욕심으로 바꾸고 싶다. 

당당하게 느리게 갈 수 있는 여유의 길에 동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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