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친구 사귀기
중학교 때 처음으로 MBTI검사를 했을 때 나는 100점 만점짜리 INFP였다. 지금도 여전히 INFP지만 여러모로 둥글어져서 간혹 가다가 ”너 외향형이야?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전부 내향형이다. 진짜 외향형이 보기엔 여전히 완전 내향형 이므로..)
아무튼 INFP들이 그렇듯이, 나도 스몰톡을 정말 싫어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 피상적인 대화, 쓸데없는 친한 척. 귀찮고 피곤한 짓이라 생각했다.
한국에서 스몰톡은 주로 외향적인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면 미국에서는 스몰톡이 기본 문화다. 눈만 마주쳐도 ‘헤이 하우아유?’ 인사하는 문화가 나에겐 너무 부담스러웠다. 대체 왜 계산대 직원과 안부를 물어야 하는지. 특히 바쁠 때 계산대에서 한참 떠들고 있는 손님과 점원은 나를 환장하게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7년간의 미국생활은 나도 스몰톡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물론 아직도 잘하지는 못한다. 스몰톡 네이티브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스몰톡 입문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싫지 않다. 특히 왜 필요한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옮겨 다닌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다른 주로. 대학 갈 때 한번 주를 옮기고 졸업하면 직장을 찾아 다시 옮긴다. 그 이후에도 자신이나 배우자의 직장에 따라 또 옮겨 다닌다. 그러다 보니 옮길 때마다 예전의 인간관계가 리셋되고 다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예전에 나는 인위적으로 친해지려는 노력을 싫어했다. 내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하는 것도 싫었다. 자연스럽게 세월이 지나고 오다가다 보면 친해질 것을… 하고 생각했다. 유일한 예외는 연애였는데 이 얘기는 나중에. 아무튼, 이 생각은 미국에 오고 곧 바뀌었다.
나에겐 이곳에서 쌓은 세월이 없었다. 따라서 관계도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등산 모임에서 첫인사 다음 주로 묻는 질문 중 하나는 “넌 언제 여기에 왔어?”이다. 대답은 일이 년부터 사오 년, 이십 년, 삼십 년까지 다양하다. 간혹 “난 워싱턴 네이티브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들 신기해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수년을 걸쳐 천천히 친구가 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러다간 친구가 생길 만하면 리셋되는 삶을 반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지역에 삼사 년씩 머물더라도 마음 맞는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빨리 친구를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스몰톡은, 말하자면 데이팅 앱의 프로필 같은 거다. 사람들은 스몰톡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살짝 열어 보이고 다른 사람을 살짝 들여다본다. “주말에 무슨 계획 있어?” 하는 질문에 “응, 나 처음으로 솔로 백패킹에 도전해!” 하고 대답할 때, 나는 상대에게 내 취미가 뭔지 알려주고 여차하면 ‘어 나도 백패킹 좋아하는데! 같이 가자!’고 말할 여지를 제공한다. 만약 상대가 “아 그래? 잘 다녀와”라고 하면 지금은 나한테 관심 없구나, 하고 판단한다.
또 사람들은 패션과 소품으로 관심사를 드러내고 스몰톡의 소재로 이용한다. 좋아하는 가수, 영화, 스포츠 팀의 티셔츠를 입고 가방엔 학교나 가입한 단체의 와펜을 부착한다. 내가 좋아하는 인디게임 티셔츠를 입고 나가면 거의 덕후 필터가 된다. 슈퍼마켓 직원부터 버스 옆자리에 탄 사람까지 엄지를 추켜올리며 ”디스코 엘리시움! 그레이트 게임! “ 하고 아는 척을 한다. 만약 자주 가는 가게의 점원이 나와 같은 영화 취향을 가졌고 스몰톡 케미도 잘 맞는다면 친구가 못될게 무언가.
친구가 되는데 까지 가지 못한다 해도 스몰톡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아무 약속도 없이 혼자 있었다 해도 가게 직원, 요가 강사,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 등과의 작은 인사와 가벼운 대화를 합하면 외롭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의 옥시토신을 모을 수 있다.
한편으로 서울에 있었다면 역시 스몰톡이 지금처럼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서울에서는 인구 밀도가 높다 보니 싫어도 항상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어서 이미 그것만으로도 피곤했던 기억이 난다. 카페 직원에게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불필요한 농담을 하지 않는 것은 안 그래도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에게 감정노동까지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배운 스몰톡은 영어로 말할 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한국말을 하면 어느새 ‘서울 모드’로 되돌아간다. 미국 사람들처럼 ‘Oh, Great!’ ‘That’s wonderful!’ 하고 반응하다 보면 어쩐지 정말 내 삶과 내 주변이 좀 더 그레이트하고 원더풀 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