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트립

나를 모시고 다니기

by 김쪼

회사를 그만두고 마사지스쿨을 가기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어디에 쓸까 하다가 로드트립을 가기로 했다. 여행을 가고는 싶지만 수입이 없어진 만큼 큰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여기서 계속 살 거라면 좀 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었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좀 알고 땅과 친해지고 싶었다.


일정은 7박 8일, 처음 3일은 주립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면서 포틀랜드까지 내려간다. 포틀랜드 비즈니스 호텔에서 하루 숙박하고 그다음 3일은 다시 캠핑을 하며 야키마라는 도시를 들러 시애틀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식단은 건조음식을 중심으로 중간중간 생과일이나 요구르트를 사다 먹는 것으로 계획했다. 여행 전 며칠 동안 식품건조기로 닭가슴살, 소고기, 볶음밥, 카레 등을 건조해 한 끼 먹을 분량만큼씩 지퍼백에 담아 준비했다.


작은 차에 텐트 및 캠핑용품, 식기, 일주일치 옷, 아이스박스, 등산용품, 접이식 자전거, 파워뱅크 등을 채워 넣고 나니 차가 빈틈없이 꽉 찼다. 혹시나 해서 휴대용 변기까지 준비했는데 결국 한 번도 안 썼다.


캠핑장에서 캠핑장까지 이동거리는 하루에 2시간 내외로 계획했지만 중간중간 가고 싶은 곳에 들르다 보면 하루 운전 시간은 실제로는 두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였다.


아침에 먼저 커피를 끓이고 베리나 요구르트로 아침을 먹고 건조음식을 보온통에 담고 물을 부어 점심을 준비한다. 텐트를 접고 짐을 전부 차에 싣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 중간중간 들르고 싶은 곳에 들러서 등산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박물관 등을 구경했다. 캠프장에 도착하면 텐트를 치고 주변을 산책하고 저녁을 먹고 다음날 여정을 확인하고 가고 싶은 곳들을 계획하다 잠이 들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고 그날그날 숙소를 제외한 모든 일정이 열려있다 보니 ’ 내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 가‘만을 하루 종일 생각하게 된다. 건조음식을 주로 먹다 보니 어느 날은 기름기가 당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짭짤한 것, 어느 날은 신선한 과일이 당겼다. 그러면 주변에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일정에 포함시켰다.


여행의 구성도 내 흥미와 관심사에 따라 맞춤형으로 바꿔 나갔다. 처음 계획은 등산을 많이 하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날이 덥고 무릎 상태가 안 좋아서 등산보다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 위주로 바꿔 나갔다.


또 거의 무료에 가까운 작은 지역박물관들이 정말 많고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예상외로 많은 박물관들을 가게 되었다. 워싱턴 주의 역사를 원주민 관점에서 또 미국이라는 나라 관점에서 배웠고 화산이나 강에 대해서도 배웠다. 마치 혼자 하는 여름방학 탐구생활 같았다.


어느 날은 등산을 가려고 계획했으나 주차공간이 협소해 돌아 나오는데 강에 거대한 댐이 보였다. 저게 뭐지? 하고 무작정 차를 몰고 갔는데 방문객이 견학할 수 있도록 열려있어서 댐의 역사도 배우고 거대한 터빈도 구경했다. 그다음 날은 인디언 문화센터에 갔는데 그 댐이 건설되기 위해 인디언들이 삶의 방식을 희생해야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이렇게 양쪽의 이야기를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의 나머지 시간 대부분은 텐트를 설치하고 이부자리와 음식을 준비하는 데 들어갔다. 나 하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매일의 성실한 노동이 필요했다. 캠핑을 간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그 귀찮은 걸 어떻게 하냐”는 물음이 내게도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그 귀찮음이란 단지 수고로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치 없음’이었다. 20대의 나는 집안일을 정말 싫어해서 집안을 쓰레기통처럼 해놓고 살았고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일로는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다. 카페나 음식점 알바를 하며 매장을 쓸고 닦는 일은 귀찮지 않았다. 남들을 위해서도 할 수 있었다.


단지 나라는 사람을 위해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가치 없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대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아닌 누군가라면 아무나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 당시의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이 싫어했다.


로드트립을 하면서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나를 위해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이제는 할만하구나. 내가 조금 더 편하게 이부자리 구성을 바꾸고, 내가 조금 더 맛있게 먹도록 식재료를 사러 가고, 내가 더 즐길 수 있게 여행 일정을 짜는 것이 나름대로 보람차구나. 이제 나라는 사람이 제법 모실 맛 나는구나.


이런 마음의 여유는 단지 자존감의 문제라고만 치환하기엔 조금 거칠게 느껴진다. 애인이 있는 것이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것, 신체적으로 건강한 것 등 여러 가지가 나 자신과 좀 더 편안한 관계로 있을 수 있게끔 도와준다. 그래도 온전히 나와 함께했던 이 로드트립의 기억이 나와의 관계가 흔들릴 때 잡아줄 수 있는 등대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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