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환상 2
*영화 <반딧불이의 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글 <여름의 환상>을 쓰고도 내 안에는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었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글에도 그 감정이 묻어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하는 의문도 계속 남아있었다.
단지 세이타에 대해서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를 옹호하고 동정하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났다. 친구가 “그저 어린애잖아. 세이타는 잘못한 것 없어.”라고 말했을 때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내 안에 떠오른 말 들은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어린아이도 철이 들어야만 했던 시절이야. 세이타보다 더 혜택 받지 못한 사람도 많았고, 더 열심히 일한 사람도 살기 힘든 시절이었어. 저렇게 특권 의식에 절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죽어도 싸).” 마지막 말을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때는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이게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인가? 어리석거나 약한 사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죽어도 싸다고?
나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파시스트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고작 중학교 3학년 애니메이션 캐릭터 때문에 나는 왜 이리 화가 난 것인가.
그 감정을 따라가다 보니 거기엔 너무 일찍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어린 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어떤 면에서는 혜택 받은 환경이었다. 부모님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 집에는 책장 가득 책이 있는 서고가 있었다. 아주 잘 산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난하다고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한편 어떤 부분은 이상적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항상 바빴고 부부간 친척 간에 갈등이 많았다. 잦은 이사를 반복해서 전학도 많이 다니고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나는 말이 없고 많은 것을 혼자 해결하는 아이로 자랐다.
부모님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양보할 줄을 몰랐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감정을 헤아려주고 보살펴줄 것을 요구했다. 나와 내 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감정적인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보살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나는 세이타의 고집스러운 에고에서 엄마와 아빠를 보았다. ‘왜 세이타는 세츠코가 자신의 고집에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하는 나의 분노는 엄마 아빠가 내 유년기를 보호해 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질투였다. “우리 아빠가 뭐든지 해결해 줄 거야!” 하는 세이타의 자신감에 대한 질투. 기다리고 있으면 크고 힘센 손이 번쩍 들어 올려 진창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것을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데에 대한 질투였다.
“나는 너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뭐든지 혼자서 했어. 넌 왜 그러지 않는 거야?” 하고 마음속 어린 내가 화를 내고 있었다.
상처와 결핍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잔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이 과거에 겪은 고통을 남이 겪을 때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별것 아니잖아! 징징거리지 마.” 하고 말하기가 더 쉽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기를 겪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채 다 아물지 못한 큰 상처를 가지고도 타인의 더 작은 상처에도 다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는 아직 멀었지만, 언젠가는 진짜 어른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