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환상

반딧불이의 묘

by 김쪼

*영화 <반딧불이의 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웬만한 지브리 영화를 다 보았지만 이 영화만큼은 보기가 망설여져서 오랫동안 피해왔다. 그러다 근처 극장에서 지브리 필름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상영해서 큰맘 먹고 보러 갔다.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중간에 꺼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을 미화한다거나 피해자 행세를 한다거나 불행 포르노라거나 여러 논란적인 평들도 보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너무 우울하고 사회적인 영화는 멘탈에 부담이 갈 것 같았다.


영화를 실제로 본 지금은 보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저 “전쟁 나빠. 아이들 불쌍해”같은 주제가 아니라 단지 전시에만 국한되지 않는 여러 주제를 담어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자마자의 감상은 슬프다기보다는 화가 났다. 아이들을 죽게 한 전쟁과 비정한 세상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인 세이타에게 화가 났다. 처음엔 세이타를 초등학교 4년생 정도의 나이로 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세이타의 자기중심적인 태도나 작중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무위키에서 중3이었다는 것을 읽고는 더더욱 화가 났다.


중3이면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어린 나이이고, 상황 판단이 잘 안 될 나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인 1940년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가 어릴 적까지만 해도 중학교 졸업하고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나 또한 중학생 때 엄마를 잃을 뻔한 일을 겪고 아직 어린 동생을 키우려면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 할 수도 있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


하물며 1940년대에 중3이면 이미 준 어른 취급을 받고 사회의 노동력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작중에서도 여러 번의 힌트가 나온다. 친척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동네 아저씨도 일을 하고 배급을 받으라고 조언한다. 같은 집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의 딸은 한두 살 위로 보이는데 매일 일을 하러 나간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시신들을 지키는 일을 하던 ‘소년’이 중학교 3학년이다.


바닷가 씬에서 대조가 드러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바닷가에 바닷물을 길러 온다. 소금이 부족해 요리용으로 바닷물을 쓰려는 것이다.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논다. 게를 발견해도 신기해하기만 하고 잡지 않는다. 아름답고 귀여운 장면이지만 남매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살고 있는지 드러낸다.


세이타는 세츠코를 위해 세상과 그들을 단절할 아름다운 거품을 만든다. 마치 자신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동화 속 아이들처럼, 잠깐의 피크닉처럼, 동굴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둘 만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그러다 사탕 한 통이 다 떨어질 즈음엔 아버지가 돌아와 그들을 예전의 안락한 삶으로 데리고 돌아갈 것처럼.


그러나 현실은 남매의 판타지를 뚫고 거침없이 들어온다. 친척 집을 나와 남매가 겪게 되는 것은 피부병과 배고픔이다. 세이타는 처음엔 사온 식재료를 사용하지만 나중인 물고기와 개구리를 잡아먹는다. 부잣집 도련님다운 예의 바른 말투를 사용하던 세이타는 처음엔 밭의 채소를 훔치고 나중에는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다.


사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세이타가 당시 또래보다 더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세이타는 군국주의 국가의 해군 장교의 아들로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영웅으로 생각하며 일본이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우월하고 당연히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 배우며 컸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재난으로 생각하지만 세이타에게 전쟁은 자신과 가족의 자부심과 사회적 지위의 근간이다. 전쟁은 언제나 자신들의 편이었다.


세이타를 무엇보다 괴롭힌 것은 집을 잃은 것도, 어머니가 죽은 것도, 배고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믿고 있던 세계의 배신이었다. 전쟁이 사실은 축복이 아니라 재난이라는 것. 아버지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라는 것. 이제 자신도 도련님이 아니라 수많은 고아 중 한 명일 뿐이고, 귀한 손님이 아닌 성가신 군식구일 뿐이라는 것. 남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노동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친척 아주머니는 언뜻 보기엔 매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른의 눈으로 다시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우선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딸을 키우며 하숙을 쳐서 먹고살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방 한 칸을 남매에게 내 준 것이다. 그녀에게 아이들은 죽은 남편 사촌의 아이들로 거의 남과 다름없다. 그런 부잣집 출신 아이들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철없는 소리를 하니 답답하고 한심한 것이다.


우리에게 그녀가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이타의 환상으로 이뤄진 거품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안온한 세계를 원한다. 우리가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보듬어주고 기다려주는 세계. 나의 욕구 충족을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세계. 유년기의 꿈과 동심이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은 채 타인에게 소중히 다뤄지는 세계.


그러나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망하고 상처 입는 것이다. 환상이 깨어지고 그 아문 자리에 현실이 자리 잡는 것이다. 어릴 적 당연하던 먹거리와 잠자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실감하는 것이며 고개 숙이고 땀 흘려 노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동심이 깨어지던 순간들을 마음 아프게 기억한다. 그래서 남매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거품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세이타 또한 그렇다. 그는 어린 세츠코의 환상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세츠코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환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지브리 스타일로 아름답게 그려진 애니메이션을 보며 남매가 언제까지나 환상 속에서 밝게 웃기를 온 마음으로 바란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진심인 것만큼 고아를 입양하거나 하다 못해 노숙인을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 먹이기 저어하는 마음도 진심이다.

그것은 우리가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이타 자신은 세츠코를 위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절규한다. 친척 아주머니에게 사과하라는 아저씨의 조언을 그는 따르지 않는다. 조국은 위대하며 자신은 특별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환상에 집착한 결과는 영화의 결말이 이미 보여준다. 영화는 6월부터 8월까지 여름 삼 개월을 다룬다. 여름을 날 수 없다면 겨울은 말할 것도 없다. 세이타는 여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아는 나이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환상은 아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정말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이타가 세츠코의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에고를 위해 여동생의 생명과 미래를 담보 잡힌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의 초반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해질 녂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엄마가 아파서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세츠코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80세 할머니처럼 주름진다. 천천히 주저 않으며 소리조차 내지 않고 온몸으로 운다.

세이타는 그녀를 마주 보지 않는다. “세츠코 이거 봐라!”라고 외치고 철봉에 매달려 빙글빙글 돈다.


세츠코는 엄마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온몸으로 슬퍼한다. 세이타는 그런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과거의 환상에 ‘매달려’ 고꾸러졌다 일어나는 곡예를 반복한다. 장면이 끝날 때까지 남매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세츠코는 세이타의 예상보다 훨씬 의연하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엄마의 무덤 대신 반딧불이의 무덤을 손수 만든다. 애도의 의식을 통해 과거를 보낸다.

세츠코는 어리고 순수하지만 그래서 유연하다. 새로운 현실을 마주한다 해도 그녀는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탕과 풍금이 없어도 또 다른 삶의 기쁨을 찾아냈을 것이다.


세이타에게는 다른 선택을 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친척 아주머니는 ‘커서 반드시 갚을 테니 다시 거두어달라’ 말하면 구박은 할지언정 내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애도였다. 하나의 세계가, 그의 유년기가 종말을 맞이했음을 슬퍼하고 충분히 상처받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랬다면 세츠코는 사탕 통이 아닌 현실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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