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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헬 Sep 17. 2021

모르는 게 약(알아도 좋고)

하이라이트와 인덕션의 차이


우리 집 주방에는 도시가스가 연결돼 있지 않다. 9년 전에 집을 수리하면서 주방 위치를 바꿨는데, 새 주방으로 도시가스를 연결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공사 업체에서 전기 쿡탑을 무료로 설치해 주겠다는 거절할 이유가 1도 없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두 번 고민 않고 그걸 덥석 물었다.


그런데 그땐 몰랐다. 전기 쿡탑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전기 쿡탑에는 하이라이트와 인덕션,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하이라이트는 열이 약하고 가열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는 반면, 인덕션은 열이 세고 가스레인지보다도 가열 시간이 짧다. 우리 집에 온 건 인덕션이 아닌 하이라이트, 였음을 알고 목덜미를 잡은 건 공사 후 9년이 지난 올해 여름이었다. 어쩐지, 전기 쿡탑 쓴다는 집들 하나같이 빠르고 세서 요리할 맛이 난다고 하던데 난 왜 끼니때마다 이렇게 요리할 맛이 떨어지나 했다. 정보에 약하고 귀까지 두꺼운 나는 몰라서 괜찮았는데 알고 나서는 허걱을 내뱉는 일이 많다.


알고 난 이상 바꿔야겠다는 생각 두 달째. 며칠 전 파스타를 삶다가 우리가 여태 먹은 건 제대로 끓어서 익은 면이 아니라 미지근한 물에 불기만 한 면이었다며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쇼핑 천재 남편이 나섰다(남편은 홍반장을 능가하는 이반장이시다.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따아따따 따따따 나타나 휘리릭 해결해 준다). 명절 전이라 인터넷 쇼핑몰 할인율이 확 올라갔으니 말만 하란다. 그러고는 두어 가지 모델을 쓰윽 살펴보더니 공돌이답게 가장 기능이 단순하고 화력 세고 남들이 많이 사고 할인율 높으며 사이즈가 맞는 놈을 십 분 만에 골라줬다. 난 뭐 이 하이라이트만 아니면 된다. 어떤 게 와도 지금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가격과 화력만 듣고 오케이했다(모양은 보지도 않았다).


그 '인덕션'이 어제 왔다. 사이즈는 딱 맞았다. 다만, 설치 기사 말로는 바로 아래 들어가 있는 오븐과 인덕션 사이에 공간이 넓지 않아 위험할 수 있단다. 일단 거치대를 달아 사이를 조금 띄웠고, 나중에 아래쪽 환기구를 조금 더 크게 뚫으면 좋고 전원은 꼭 분리하라고 했다(환기구와 전원 문제는 역시 이 반장이 저녁 먹기 무섭게 따아따따 따따따 나타나 해결해 주셨다).


화구를 바꾼 기념으로 저녁은 파스타를 먹었다. 물 끓는 속도와 화력에 감탄을 연발하며 면을 삶았다. 그런데 좀 정신이 없기도 했다. 전에는 끓고 익는 시간이 워낙 길어서 답답한 면은 있어도 느릿느릿 움직이며 물 올리고 재료 다듬고 창고에도 갔다가 쓰레기도 버리며 멀티태스킹을 했는데, 올려놓고 돌아보면 끓고 있어서 요리의 리듬이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사실 갑자기 리듬이 바뀌어서 면 하나 삶으며 혼비백산했다. 설마 느리게 요리하던 시간이 그리워질 수도 있을까 잠시 고민할 정도로.


그런데 가만, 파스타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냄비는 물론 프라이팬도 스테인리스 재질을 쓴다. 냄비는 그렇다 치고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은 예열이 생명이라 예열을 안 하면 계란 프라이 하나도 못 해 먹는다. 전에 가스레인지 쓸 때는 1분쯤 예열하고 잠깐 식히면 계란을 터뜨려 넣을 수 있었는데, 하이라이트에서는 예열 시간이 정확히 6분 걸렸다. 작은 프라이팬은 3분이면 되지만, 어쨌든 네 식구 먹을 계란 프라이를 하려면 짧게 잡아도 8분은 걸린다. 코팅 팬도 써 봤으나 코팅이 벗겨지면 버리고 다시 사는 일이 잦아져서 번거롭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해서 나름 환경과 건강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언젠가부터는 줄곧 스테인리스 팬만 썼다. 인덕션과 달리 하이라이트에서는 코팅 팬을 쓸 수 있다. 다들 코팅 팬 못 쓴다는데 왜 우리 집은 코팅 팬이 되지, 했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으니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익은 파스타로 만든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문득 궁금해서 지난 9년간 프라이팬 예열한 시간을 계산해 봤다. 하루에 두세   날도 있지만   날도 있으므로 9 동안 매일 하루에  번씩 프라이팬을 6분씩 예열했다 치니, 19,710분이 나왔다. 숫자를  다듬으면, 나는 지난 9년간 (소수점 뒷자리 반올림해서) 14일을 오롯이 프라이팬 예열에  것이다. 물론 그러고 가만  있지만은 않았지만 띄엄띄엄 계속된 시간을 쭈욱 붙여서 14일을 통으로 묶어 영화로 만든다면 정말 지루한 영화가   같다.


아침에 기분 좋게 계란국을 끓였는데 율들이 더 맛있다고 한다. 높은 온도에서 제대로 끓어서 그런 모양이라고 했더니 진심으로 라면 맛이 기대된단다. 음, 정말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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