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무기가 필요해
일하라고 해서 일하고 쉬라고 해서 쉬는 삶을 사는 게 아니니, 나는 지갑 속에 남은 동전을 세 듯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을 칼 같이 헤아리며 일주일을 보낸다. 어떤 종류든 일이 들어오면 난이도와 분량을 보고 하루 작업 분량을 계산하고, 웬만해서는 그 분량을 채운 뒤에 업무 종료를 외친다. 물론, 번역은 양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감의 제1원칙은 양이고, 양으로 일정을 당겨 놔야 질을 채울 여지가 생기므로 양을 무시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랬다. 발번역으로라도 납기일을 지켜 준 역자가 납기일 닥쳐서 잠수 타 버리는 역자보다 백 배 낫다고.
마감 안에 양과 질을 모두 채워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 마음만큼 나는 휴일이 간절하다. 토요일은 주중에 분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남겨 놓은 날이라 '영업일'도 '휴일'도 아닌 애매한 날이긴 하지만, 10년 가까이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일요일을 못 쉬고 일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요일을 쉬기 위해 토요일에 밤을 새우더라도, 토요일에 안 될 것 같으면 금요일에 미리 한 번 더 밤을 새우더라도, 일요일은 나에게 절대적인 '휴일'이다.
절대적인 휴일에 내가 가장 열 올리는 일은, 살림이다.
서두르고 쫓기지 않으며 하고 싶은 만큼만 한다는 전제하에 나는 살림이 즐겁다.
오전에는 대면 예배든 온라인 예배든 교회 모임을 하는데, 모임 시간을 고려해 아침 일찍부터 시간을 계산해서 세탁기에 빨래를 넣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세탁기 소리와 건조기 소리는 내 휴일의 BGM이 된다. 하루 종일 서너 통을 돌리는데(일주일 빨래를 몰아서 하므로) 웬만한 흰옷과 수건은 '삶음' 코스, 삶지 못할 흰옷과 연한 색 옷은 '컬러케어' 코스, 짙은 색 옷은 '표준' 코스가 맡아 주고, '이불' 코스까지 추가되는 날도 있다.
'열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점심 전후다. 일요일 점심만은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라면은 작은율이 끓이는데, 그사이 나는 빨래를 개거나 마당에 이불을 내다 말린다. 해 나는 일요일은 특별 보너스 같다. 해가 바삭하게 난다 싶은 날은 하루 종일 이불도 몇 채가 나왔다 들어간다.
일꾼이 새참 먹듯 작은율이 끓인 라면을 얻어먹고, 큰율이 설거지를 시작하면 나는 찬장을 닦거나 냉장고를 닦는다. 전에는 빨리 닦아버리고 싶어서 애꿎은 수세미를 혼냈는데, 최근에 애독하는 브런치 작가님의 글에서 분무기로 미리 물을 뿌려 뒀다가 오염된 부분을 지우신다는 부분을 읽고는 나도 분무기를 애용하고 있다. 과탄소든 베이킹소다든 구연산이든 뭔가를 물에 타서 분무기에 담아 칙칙 뿌려 뒀다가 다른 것 다 치우고 쓱 닦으면 수세미 탓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 제일 공들여 닦는 물건은 새로 산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다. 답답이 하이라이트 시절에 예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바닥이 변형된 프라이팬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인덕션에 올리니 표면에 착 붙지 않아 불이 들어왔다 나왔다 해서 그중 제일 큰 놈을 먼저 바꿨다. 스테인리스 제품은 어차피 쓰다 보면 얼룩이 무늬처럼 보이는 때가 오는 법인데, 그걸 알면서도 초반에는 이렇게 광내는 데 열을 낸다(나만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자꾸 닦다 보면 길이 드는지 물 얼룩이 좀 덜 지는 때가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요리한 팬을 인덕션 잔열에 그대로 올린 채 베이킹소다 물에 불려 놓고, 식사가 끝나면 부드러운 수세미로 큰 덩어리를 없앤 뒤 물을 버리고 다시 마른 베이킹소다를 뿌려 꽉 짠 수세미로 닦는다. 물로 헹군 뒤에는 얼룩이 생기지 않도록 마른행주로 물기를 없앤다. 변색의 기미가 보이면 물을 채우고 구연산을 뿌려 놓거나 그대로 한 번 끓인다(솔직히 이게 굉장한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수술한 의사가 하는 말처럼, 나도 프라이팬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나한테라도 할 수 있게 그렇게 한다). 말이 쉽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다. 바꾸기 귀찮아서 그대로 써 온 역사가 아니라면 못 할 짓이지 싶다. 아무튼 새 프라이팬만 닦아줄 수 없어서 본래 있던 냄비들도 부쩍 손이 가니 요즘은 냄비들이 전부 분칠 한 얼굴처럼 매끈해 보인다.
베이킹소다 물을 넣은 분무기는 프라이팬 말고도 여기저기 유용하게 쓰인다. 특히 주방에서는 감히 필수품이라고까지 말하겠다. 밥 먹은 식탁, 인덕션, 개수대, 타일 벽, 밥통, 건조대, 싱크대 손 닿는 부분, 냉장고 손잡이까지 분무기를 쓰면 칙칙 뿌리는 재미가 있다. 불리고 묵히면 힘쓰지 않아도 잘 닦이는데 그걸 몰랐다.
주방에서 욕실, 옷장, 마당을 오가며 점심 먹고 두세 시간, 길면 서너 시간을 보내면 딱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의 살림이 끝난다. 어차피 주방 살림은 매일 계속되지만, 유희로서의 썩 괜찮은 노동은 이 정도가 좋다. 나머지는 일단 일요일에는 모른척한다. 주중에도 살림은 계속되고 우리 집엔 나말고 이반장과 율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닦고 치우는 걸 본래 이렇게 열 올리며 한 건 아니다. 결혼한 지 15년, 내 손으로 내 살림이란 걸 한 지 15년이 돼 가니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면서 할 일이 계속 는다. 손에 익으면 더 빨라지고 가뿐해져야 할 텐데, 알면 알수록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닦고 치우고 관리해야 할 것들이 늘어간다. 여기를 닦으면 저기가 또 보이고, 저기를 치우면 여기가 또 보인다. 왜 익숙한 만큼 느려지는 것일까.
요즘 내 번역도 그렇다. 촘촘하게 분량을 나눠 놓고, 이번 주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야지 하는데 끝내도 여기저기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면 일한 것 같지가 않다. 이번 책은 지난번 책하면서 검토했던 책을 그대로 받게 돼서 전체 그림을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시작하고 보니 불리고 묵혀야 할 무언가가 계속 보인다. 여기서도 쓸 수 있는 분무기가 있으면 좋겠다. 과탄소랑 베이킹소다 같은 특효약이 있어서 물에 풀어 넣고 칙칙 뿌려 불리고 묵혔다 분량 채우고 돌아와서 살살 닦으면 분칠 한 얼굴처럼 단어와 문장과 의미까지 매끈해지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아닌가.
익숙해졌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일 뿐,
얼룩도 무늬가 될 수 있는 가뿐한 시점은 따로 있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