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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호 Jan 31. 2022

하이난 코피와 토스트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중국계 거주민들의 거리에서 ‘瓊/琼’ 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음식점을 발견한다면, 꼭 한번은 들러 보는 것이 좋다. 한국식 발음으로 경, 북경어 발음으로는 Qiong, 현지 중국계의 발음으로는 Keng/Kheng인 이 한자는 중국의 하이난, 즉 해남도를 가리킨다. 瓊/Keng이 들어간 음식점, 커피숍은 대부분 이 하이난 출신 화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하이난 출신 중국계의 동남아 이주는 사실 그리 역사가 길지 않고, 숫자도 많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큰 방언 집단을 형성하고 끈끈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확고한 영역을 구출해 놓았던 푸젠계/호키엔, 차오저우/떼오추, 광둥/캔터니즈, 객가/하카 집단들 때문에 후발주자인 하이난 출신 화인들은 19세기 중후반부터 동남아시아 지역, 특히 말라야, 해협식민지 지역에서 주로 영국식 레스토랑의 점원, 주방보조, 영국 식민 고위관료의 하인, 집사, 호텔의 객실관리, 바텐더, 지배인 등을 주로 담당하였고, 그렇게 전수받은 영국식 레시피, 에티켓, 커피 및 음료 주조, 운영 등의 노하우를 축적해갔다.


이후 2차 대전이 끝나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각각 독립하면서 동시에 홀로서게 된 하이난 화인들은 그들의 노하우와 재능을 바탕으로 곳곳에 음식점과 커피숍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하이난인들의 레시피는 그대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화인들의 입맛을 대표하게 된다. 유명한 치킨라이스, 카야토스트, 싱가포르 슬링, 하이난식 코피 등이 모두 그들의 작품이다. 특히 하이난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정착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려내게 된 코피Kopi는 동남아시아 커피문화의 한 축이다. 그들은 동남아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우려내는 이들 가운데 하나다.


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말레이시아 끌랑의 ‘춘관偆園 하이난 커피’ 역시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6년에 설립된 이 커피숍의 1대는 푸히홍으로 그는 일찍이 1950년대 초 말레이시아로 건너와 영국관료의 주방장으로 일했다. 해당 관료가 1956년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푸씨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거절하였다. 푸씨의 재능을 아까워한 이 관료가 그에게 카페를 차리라고 하면서 땅을 넘겨준 것이 춘관 하이난 커피의 시작이다.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한 푸히홍은 1959년 부인과 딸을 불러와 본격적으로 정착하였다. 이후 생긴 두 자녀 포함 모든 가족들이 함께 일하면서 가족 사업이 되었다. 2대는 푸히홍의 자녀들 가운데 두 딸이 운영하였고, 지금은 3대인 손자 데이빗 칸씨가 이어받았다. 30대의 금융업 종사자였던 3대 손자가 일을 그만두고 사업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춘관 하이난 커피에서 파는 것이야말로 하이난 퀴진의 전형적인 메뉴들이다. 하이난식으로 우려낸 코피 한잔, 반쯤 익힌 계란과 그 위에 살짝 뿌린 간장, 바싹 구운 식빵, 두툼한 버터 한 장과 카야 소스로 구성된 브런치 메뉴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화인 아점의 전형으로 하이난인들이 나름 영국식과 말레이식, 중국식을 혼합하여 구성한 메뉴다. 그리고 상질의 닭으로 유명한 하이난 출신답게, 그리고 무슬림 국가인 말레이시아인들에게도 부담 없는 치킨라이스, 영국관료의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익힌 피쉬 앤 칩스, 디저트로 그만인 푸딩 등이 있다. 저녁에는 스팀봇 샤브샤브를 판매한다.


또한 보르네오섬 사바주의 쿠닷의 화인거리에도 하이난식 커피와 스낵을 파는 가게가 있다. 팡혹라이씨가 운영하는 컹남통/瓊南通酒店이다. 팡씨는 하이난 화인 2대로 그의 아버지는 1948년에 사바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 커피숍을 오픈하였다. 쿠닷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마을이다. 낡은 건물에 아는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는 이 커피숍 역시 전형적인 하이난식 ‘코피’와 브런치를 판매하고 있다. 작은 잔에 넘칠 듯 가득 채운 까만 커피와 홈메이드 카야토스트. 이 동네에는 비슷한 시기 문을 연 하이난식 커피숍들이 많다고 한다. 컹남풍, 림컹록 등. 


싱가포르에는 하이난인들의 이러한 레시피가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화되기도 하는데, 야쿤 카야 토스트, 싱가포르 슬링, 커피 및 브런치숍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한스 등이 있다. 심지어 싱가포르에서는 2000년 TV 시리즈로 Hainan Kopi Tales 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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