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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1994,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사를 흔들어 놓은 too much talk

by coron A

80년대를 거처 90년대에 이르러 새천년을 넘어올 때까지 영화는 현실주의를 표방한 극사실적 표현을 명분으로 하드고어 하거나 하드코어한 작품들로 넘쳐났다. 그런 영화들 중 물론 유수의 영화제를 이끈 훌륭한 영화도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조차 의심되는 영화가 대부분일 것이다. 과거 60년대 이후 영화는 끊임없이 TV와 경쟁하며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올 방법들을 연구했다. 그 돌파구 중 하나가 리얼리즘을 표방한 이러한 자극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80년대 홍콩 누아르가 영향을 준 피 튀기는 영화들을 비롯하여 90년대에 이르러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1989), <원초적 본능>(1992), <양들의 침묵>(1991), <크래쉬>(1998) 등 영화는 아슬아슬한 표현의 수위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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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나온 타란티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은 아저씨들의 시덥잖아 보이는 수다로부터 시작된다.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이자 강점은 다른 강렬한 영화들과 비교하여 자신만의 인장을 제대로 찍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들이다. 뭔가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들로 화면을 채우는 것 같지만 평론가 로저 애버트의 평에 따르면 이러한 정신없는 대사로 인하여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의 폭력성이 상쇄될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특히 <펄프픽션>에서는 영화의 시작을 여는 펌킨과 허니버니의 대화에 이어 빈센트와 줄스, 어린 부치와 쿤츠 대위, 부치와 파비앙의 대화의 내용들은 영화의 줄거리를 이어가는 행위와는 동떨어져 있지만, 결국 다음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견인하는 복선의 역할을 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대사 속에서 영화 내부의 인물들 의 권력관계라든가 다음 벌어질 사건에 대한 암시가 녹아있다. 보통 대부분의 영화는 인물간의 대화가 영화의 흐름을 직접 이끌어가는 내러티브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펄프픽션> 속의 대화는 그 내용이 내러티브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후에 올 장면에 대한 충분한 복선을 깔고 있고, 그 속에 유머와 위트를 적절히 가미하여 가슴에 대바늘을 꽂는다던가 피가 튀고 강간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장면들의 잔인성을 상쇄시켜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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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펄프픽션>은 시작부터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영화라 할 수 있는데 개봉 당시 이는 미아와 빈센트의 트위스트 못지않게 센세이션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펄프픽션>의 시간은 트위스트처럼 꼬여있다. 이렇게 휘어진 시간을 이해할 수 있는 순서로 암시하는 것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복잡한 대화와 이미지다. 부치와 빈센트의 스치듯 지나가는 대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폭력성의 가장 정점에 있는 마르셀러스의 절대 권력을 결코 잔인하거나 파괴적인 장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권위는 주로 대사에서 드러나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엄청난 일을 배신자 부치 앞에서 겪는다. 매우 선정적인 장면이지만 또한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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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가게 점원으로부터 시작된 타란티노의 영화 경력은 <펄프픽션>의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잭 래빗 슬림스의 모든 캐릭터나 사물의 명칭은 고전영화의 배우와 감독의 이름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부치와 에스메랄다의 택시 안 장면은 고전 누아르의 촬영 기법을 차용하여 영화광으로서 그의 역사적인 시작을 대변한다. 이후 타란티노의 영화는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만들며 타란티노적 장르를 만들어 냈다. 여전히 그의 모든 영화에 등장하는 훌륭하고 정신없는 모든 대사들과 <저수지의 개들>의 창고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공간을 확장하는 촬영방식은 <헤이트풀 8>(2015)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펄프픽션>이 세상에 처음 공개됐을 때의 충격은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주류를 형성하던 내러티브와 드라마에 천착하던 영화의 방향을 B급 정서 이상으로 확장하고 전환하는데 꽤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영화사의 흐름을 바꾸는 어떤 시작이었다.







로저 애버트 『위대한 영화』 <펄프픽션> p615~p620

제프리 노엘 『옥스퍼드 세계영화사』 p893~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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