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심어준 허상의 심연
원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연출 사이몬 스톤
주연 빌리 파이퍼
인간의 욕망은 기본적으로는 본능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 연극을 보고 있으면 본능이 부르는 어떤 욕망보다도 인간의 삶 속에서의 학습된 어떤 DATA들이 만들어낸 욕망이 오히려 인간을 파멸의 길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르마와 그의 애인 아니 곧 남편이 될 존은 행복한(보이는) 관계다. 그들은 집을 구입했으며 자신들의 품위를 지켜줄 적절한 직업이 있고 그 직업 속에서 인정받고 있는 나름 자리를 잡은 30대들이다. 좋은 집을 산 날, 그 집에서 조촐히 축하를 하며 존과 예르마는 완벽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다.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아이가 있는 삶, 아주 단순하고 지극히 당연한 욕망이긴 한데 여기서부터 그들의 삶에 제동이 걸린다. 아이를 전혀 원하지 않던 예르마의 언니 그리고 사랑도 없이 아이를 낳아 학대에 가까운 방치를 했던 엄마조차도 쉽게 낳아 기르던 아이가 완벽히 갖추어진 예르마에게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예르마의 인생은 완전한 성공이라고 까진 할 수 없겠지만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어느 정도 성취한 위치에 있고 그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겉보기에도 가장 쉬울거 같은 아이를 갖겠다는 희망, 그 소원은 그녀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완벽해지고 있던 예르마의 인생이 그녀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 금이가기 시작하는데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노력하면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연극은 상황의 요점을 핀포인프로 찍듯이 간결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이 완벽한 새 집에서 아이를 원하는 존과 예르마 예비 부부, 무대에서 보이는 통유리 속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춘 우아한 중산층이다.(중산층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르마의 아이에 대한 집착은 보여지는 세련된 모습과는 달리 조금씩 뒤틀려서 예르마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차지해간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고충을 이해하기는 커녕 잘 됐다고 강조하는 엄마, 늘 삐걱거리는 부부관계를 지겨워하는 언니, 항상 출장에 쫒기는 존. 뭔가 상황은 조금씩 비틀어지지만 예르마는 이상하리만치 쉽게 생기는 언니의 아기를 돌보며 완벽한 가족을 코스프레한다.
시간이 갈수록 세련된 품위 아래 위선과 악의로 채워진 예르마의 그림자는 두번째 아기를 가진 언니를 악날하게 증오한다. 익명이 전제된 그녀의 블로거에서 그녀는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의 모든 원인을 모두 타인의 탓으로 매도한다. 늘 바빠서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존을 탓하고 헤어진 옛 연인을 유혹하며 아이를 갖고 싶다는 이유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 앞에서 위험하게 서성인다. 하지만 검사결과 아이를 가지는데 문제가 된 이는 존이 아닌 예르마인 것으로 밝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 붓던 예르마의 블로그도 드러나며 하나 둘 사람들은 예르마의 곁을 떠난다. 아이를 가지기 위한 노력이 예르마를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지만 존은 마지막까지 시험관 아기를 시도하는 그녀의 곁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을 받치고 있던 그 중산층이란 기반마저 허물어진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날리고 존은 예르마를 떠난다. 무대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예르마의 욕망은 이해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위험 수위를 넘어선 예르마의 아기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이 존을 의심하며 그녀의 곁에서 많은 것을 감수하던 그를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왜 그녀는그 욕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상영 후 나오면서 들었다. 인간의 사회가 던져주는 DATA, "그녀의 아이에 대한 집착은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어느 한 관객의 말이 귀에 꽂힌다.
거대한 유리벽 안에서 벌어지는 이 연극은 관객이 그 유리감옥 안의 배우들을 드려다 보듯 사회의 시선이 우리의 삶을 드려다 보고 있음을 적나라 표현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사람들은 보여주기 위한(보여주기 좋은) 모습을 만드는데 자신을 쏟아 붓는다. 여기에 예르마의 집착의 이유가 존재한다. 나는 드러나 있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고 있다. 예르마의 마지막 한가지는 여기에 아이만 하나 있으면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집착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자존감을 날려버리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녀에게 아이는 완벽한 모습의 마지막 요소이기도 하지만 예르마의 잠재된 엄마의 학대에 대한 복수의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여성이지만 모성결핍이었던 그녀의 엄마에게 예르마는 보란 듯이 훌륭한 가정을 가진 성공한 여성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훌륭한 가정은 무엇보다도 아이가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요소가 되어 버린다. 그녀 곁의 존은 아이를 가지기 위한 조력자일 뿐 연인 아니 남편이라는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 아이를 잘 키우는 성공한 여성으로 엄마 앞에 서는 것 그것 또한 예르마가 아기에 집착하는 또다른 이유다.
성공에 대한 집착, 성공함으로서 갖출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 그리고 모든 것이 스스로의 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오만함, 그 모든 것이 아기라는 한 가지 요소로 집약되어 차근차근 예르마를 망가트린다. 연극은 이러한 예르마의 이야기들을 간결함과 선명함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날카로운 간명함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그녀의 욕망으로부터 오는 모든 행위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집착에 측은함이 생긴다. 이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가 부추기는 허영과 오만함이 만든 희생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본능이라는 욕망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허영과 오만의 세계보다도 인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