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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Jan 25. 2024

<분노>(2016, 이상일)

불안과 성급함은 믿음을 잠식한다.

*스포많음*


    어느 무더운 여름날, 조용한 주택가 한 저택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세 명의 낯선 청년이 서로 다른 곳에 나타난다. 범인은 사라지고 경찰은 결국 용의자의 다양한 모습을 TV에 공개수배한다. 라면 가게에서 나오토와 저녁을 먹던 유마도, 오키나와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타나카에게 쟁반을 건네던 타츠야의 어머니도, 동거를 위해 이사하는 아이코와 타시로를 돕던 어린아이도 공개수배 방송을 본다. 순간 스쳐 지나간 TV 속 얼굴 때문에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유마는 성급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인물 간의 신뢰가 깨어지기 시작할 때까지, 유마의 등장은 언제나 앞 장면을 침범한다. 강렬한 배경 음악이 앞서 나오기도 하고 그의 말이 앞 장면의 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유마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개의치 않고 언제나 당당하고 즐겁게 사는 듯 보이지만 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호스피스 병동에 있고, 매음굴을 헤매다 나오토를 만난다. 아마도 그를 지배하는 감춰진 불안은 혼자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오토를 만난 이후 유마는 같이 한 무덤에 들어가자는 청혼 같은 고백을 할 만큼 나오토를 의지한다. 하지만 주변의 뜬소문과 오해로 인해 그는 성급하게 나오토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다. 

 마키는 가출한 딸 아이코를 6개월 만에 긴자의 성매매업소에서 찾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던 날, 아이코의 눈에 타시로라는 청년이 들어온다. 늘 웃기만 하는 남다른 아이코는 무언가를 감추는 듯 조용하고 성실한 타시로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생명의 위협을 피해 숨어 사는 타시로에게 성매매업소에서 당한 경험을 투영한 아이코는 타시로와 동거하겠다 선언하고, 아버지의 불안은 정체 모를 사내에게 성급하게 빠져버린 딸로 인해 더 커진다. TV에서 스쳐 간 용의자의 얼굴이 타시로와 닮았다는 아이의 한마디에 마키는 타시로에 대한 아이코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다. 불안에 사로잡힌 아이코는 타시로에게 돈을 쥐여준 후 경찰에 신고한다.  

 타츠야와 이즈미 그리고 무인도에 체류하던 타나카와의 만남은 오키나와의 역사적 상흔과 겹친다. 영화는 타나카가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그의 행동이나 은신처의 물품 등을 통해 은밀히 보여주는데, 살인 사건의 범인인 타나카 아니 야마가미가 얽힌 이즈미의 사건은 오키나와가 숨겨둔 어두운 그림자다. 미군 범죄는 오랜 투쟁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답답한 패배 의식으로 사람들에게 쌓여간다. 그 피해는 무관심 혹은 피해자에 대한 폄훼로 개인화되고 해결할 수 없는 미군 문제라는 변명으로 다시 발전한다. 이 이상한 악순환의 고통은 고스란히 두 아이의 몫이 되고 용의자는 그 속에 범죄의 얼굴을 감춘다. 아직은 순수한 아이들이기에 간악한 악어의 눈물 앞에 믿음은 쉽게 쌓이고 그 결말은 참혹하다. 

 사회적 통념의 압박에서 유마와 마키 부녀가 숨겨야 할 불안은 성급함으로 이어지고 타인에 대한 믿음과 배려를 저버린다. 범인인 야마가미 역시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일지도 모른다. 미군이 주둔하는 오키나와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이즈미와 타츠야는 괴물이 된 타나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생을 마주한다. 시련 없는 인생은 없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영화 속 모든 문제는 개인사로 회귀하고 이를 회복해야 할 사회의 기능은 보이지 않는다. 무더운 사무실에 앉아 TV만 바라보는 답답하고 무능해 보이는 형사들의 모습과 인물들의 신뢰를 잠식하는 불안과 성급함을 쌓는 에피소드 간의 교차 편집은 강력 범죄 위에 ‘믿음’이 무너져가는 상황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사건 이후 이즈미의 흰 의상은 다소 거슬리지만, 그녀의 분노에 찬 절규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신뢰의 무게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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