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것을 사회에 외치지 말라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교육자란 무엇인가.

왜 교육자를 희망하는가?

누군가 내게, 그리고 그대들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교육은 영어로 'education'으로, 'educere'라는 어원에서 출발하였다. 그 의미는 '본성을 이끌어낸다(lead out)' 라는 것으로, 루소는 자연상태에서의 본성을 강조하며, 교육은 학생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에 사는 교육자는 학생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미 AI가 한 명의 교사가 익힐 수 있는 지식의 양을 넘어선지 오래이고, 날로날로 그 정교함이 더해져 간다. 또한, 내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고, 심지어는 교육과정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에꼴 42, 42서울, 42경산, 태재대학교, COSERA, K-MOOC을 보라... 이미 그렇지 아니한가.


어떤 사람들은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가 단지 '공부를 잘해서' 또는 '그 과목을 좋아해서',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고 싶어서'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런 이유들을 비판하는 글은 아니다. 나 또한, 교육자가 되고 싶은 이유가 이 3가지 중에 적어도 하나 이상은 해당됐기 때문이다.


AI가 활성화된 시기에 교육자의 역할은 '학생의 내적 동기와 학습도구의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맞춤형 교육과 전략을 짜는 것은 학습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더 잘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교육자 그리고 교사는 학습자의 내적동기를 끌어올리는 것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학생들이야 태블릿이 있고, 거기에 더해 매달의 소정의 수업료를 감당한다면, 공부를 할 수 있지만,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학생들은 아무리 좋은 학습기기를 가져다 줘도 그것은 한낱 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문제는 단순히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하는 학생들이 아니다. 문제는 부모님이 바쁘셔서, 사회경제적 지위로 인한 정보부족으로, 조손가정이어서 등등 돌봄의 공백이 있는 학생들, 즉, 공부를 하라고 말하는 어른 조차 없어서 그런 공부 자극이나 진로 자극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비슷한 조건의 진로자극을 주어야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자극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한 교수님께서 반문하였다.


그것은 '그것을 그들이 원했는가' 하는 말이다.


서두에서 나는 내게, 그리고 그대들에게 '왜 교육자를 희망하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대답은 '자기가 그 과목을 좋아하기 때문에',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이들은 본인이 공부를 가르친 아이가 본인 덕분에 잘 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닌다. 어떤 학원에서는 학생이 성적이 오르면 학원이름 옆에 큼직하게 합격자 수나 학생 이름을 플랜카드로 내걸기도 한다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실정은 교육계만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복지현장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에서 '검정고시 합격, 00 대학 합격' 현수막은 역시 으레 있는 일이고, 보육원이나 교육복지, 청소년자립지원센터 근무자들도 종종 아동, 청소년이 자립하면 본인이 유능해서 아이가 잘 되었다며 이야기 하곤 한다.


물론 선생님들의 노고를 폄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학창시절 기억을 떠올려 볼 뿐이다.


과연 나는 내가 대학을 가게 된 것이 담임 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했는지 말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 다시 현재 교육 현장에 아이들의 눈빛을 떠올려 본다. 진로 진학 조언을 할 때, 그들의 표정을 떠올려보면,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잔소리로,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니까 듣는 시늉이라도 해드리며 그저 건성건성 듣고 있는가 말이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여러 진로를 제시해주고, 내적 동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그 기반에는 사실 '사회는 불공평해. 평등해지려면 다들 공부해야 해.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의 KEY니까 교육 자극을 동등하게 주어야 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사업을 해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학문을 깊게 탐구해서 사회의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주어진 일을 하고, 하루 번 돈으로 한끼를 해결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에는 정답도 없고,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판단할 권한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역사와 한국사를 보면, 빈민 구제 제도는 시혜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누군가의 오지랖으로부터 발현되었으며, 다른 편에 누군가는 그 시혜적 복지에 기대어 살고,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내게 반문했던 교수님께서는 '최소한의 지원'이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하였다. 다시 말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학생에게 사용처를 묻지 않고 묵묵히 지원해줄 수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에 대하여, '사회를 평등하게 바꾸려고 하지 말고, 본인을 바꿔야 한다. 나를 바꾸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깊은 고찰에도 어느 것이, 무엇이 정답인지는 명확히 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 답은 누구도 내려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타인을 돕고자 하는 그 마음이 선한 의도였든 악한 의도였든 남을 판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나, 이타심이 공동체를 이끌어간다는 신념으로 한 걸음씩 내딛기로 결정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교육', 학생의 본성을 이끌어내는 것을 내가 할 수 없을지언정,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사회로 귀결하지 않고, 내 본성에 충실하다보면 내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이 달라졌으리라.


또, 그러다보면, 타인의 잠재력도 온전히 들여다보고보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나가는 것을 격려해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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