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후 나의 20대 초반은 성당에서, 중후반까지는 유학으로, 그리고는 취업을 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적었다. 게다가 30대 초중반은 스윙댄스에 빠져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더 부족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아빠와 어떤 대화를 진중히 한 적이 없던 것 같다. 시간과 기회가 있었어도 그런 진지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난 또 어린아이처럼 앵앵댔을 것이다.
반대로 오빠는 아빠와 둘이 맥주 한잔, 소주 한잔 하던 기억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 돌아가시고 난 후, 내가 모르고 있던 아빠의 생각과 말들을 가끔 오빠에게 전해듣곤 한다.
아빠가 내게 했던 말들은 보통 잘한다, 잘했다, 잘 할꺼다, 잘 될꺼다 뭐 이런 칭찬과 축복의 말들이었던 것 같다. 공부도 곧잘 하고, 운동이나 음악이나 뭐 가르치면 잘 배워서 스폰지 같이 빨아들였다는 말도 아빠에게 많이 들었다. 유학을 다녀왔을 때는 이제 국제숙녀가 되었다고 자랑스러워했는데 '국제숙녀'라는 말이 묘하게 올드해서 난 항상 '푸핫' 웃곤 했다. 학창시절, 뚱뚱했던 아빠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어 속상해 할 때엔 "딸이 아빠 닮으면 잘산대~!" 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고, "필요한 것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아빠한테 말하라"는 말은 성인이 되고 나서, 특히 20대 중반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내 인생을 응원하는 치어리더였나보다. 내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아빠의 장례식장을 찾은 아빠의 친구들과 지인분들께 인사를 드릴 때 "아~ 영상이 딸!, 아빠가 너 자랑 엄청 했어~ 그거 알아?" 와 같은 말을 몇 번 들었다. 누가 칭찬을 해줘도 "아이~ 아니에요~"하는 칭찬 알러지 양반이 바깥에서 자식 자랑을 하고 다녔다니... 자랑거리가 되었다니 효도한 것 같아 기분이 좋긴 했다.
아빠가 강조하던 덕목이 있다면, 신용이겠다. 초등학교 때 가훈을 알아오라고 하면 우리집 가훈은 '신용있는 사람이 되자'"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용보다는 신뢰가 맞지 않나 싶은데, 뭐 대충 약속을 잘 지키자는 그런거였다.
그리고 너무 계산하지 말고 좀 손해 보듯이 살라고도 했고 (하지만 보증은 절대 안된다고 천만번 말함) 돈이 많을 필요는 없는데 너무 없어도 안된다는 말들.
말과 행동이 달랐다면 콧방귀를 꼈을텐데 아빠는 정말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술에 취해 기억도 나지 않던 초딩 딸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지켰고,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베풀며 살았고 돈은 악착같이 모아 부동산 대박같은 사건이 없었음에도 우리집은 조금씩 여유로워졌다.
아빠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약속은 꽤나 잘 지키는 편이고, 계산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부작용이라면 가끔 받을 돈에 대한 계산이 흐리기도 하다. 주식이나 부동산에도 재주는 없는 것 같고 그냥 꾸준함으로 돈을 모으고 있다가 재테크에 눈을 떠서 요즘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하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중 우리 아빠는 가난한 아빠였던 것 같다...
아빠의 투병기간은 5년정도였는데 그 기간동안 가족들에게 거의 매일 하던 말이 있다.
"고맙다", "미안하다"
고마운건 그럴 수 있는데 미안할건 없는데... 아픈 사람이 미안할 일인가...
마누라와 자식들이 본인 때문에 몸 쓰고 마음 쓰고 돈 쓰고 하는 모든 게 미안했나보다.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나중에 내가 아파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신경쓰고 잘해준다면 미안해 질 것 같다. 자기들 갈 길 가야되는데 내가 방해하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러 와 준 아이들이 고맙고 내일 또 보고싶고 그럴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아빠는 구구절절 말하지 못해 그냥 저 두 마디로 매일매일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마무리도 예쁘게 하고 간 우리 아빠.
진심은 투박하게라도 전달했던 아빠.
대화의 기술이 심하게 부족한 나 자신을 한심해하고 답답해하는 요즘인데,
습관적인 말 말고, 진심을 전달하는 말하기를 연습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