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팅, 일본 카피, 일본 광고
멋진 문장을 노트에 채집한 적 있지 않은가? 심금을 울리는 대사, 존경하던 대가의 명언, 촌철살인으로 현실을 찌르는 교훈. 문장 수집욕은 누구에게나 있다. 길고 복잡한 인생이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됐을 때의 안정감. 예로부터 가훈과 급훈이 역할 했던 것처럼, 인생을 관통한 단단한 문장은 *셰르파가 되어준다.
*셰르파: 네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거주하며, 높은 고도에 적응된 신체를 바탕으로 등반가의 짐을 옮기고 길을 안내하는 산악 민족
글은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렵다. 생략의 기술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연필을 뾰족하게 갈아 날카롭게 다듬은 문장은 심장을 파고든다. 보통 이런 문장은 영화나 책, 타인의 입에서 의도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카피는 다르다. 애초에 심금을 울려야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는 카피는 ‘웃겨봐!’라는 무례한 요청을 받은 코미디언의 난처함만큼이나 난이도가 상당하다. 때로는 2시간 분량의 영화를, 때로는 수백 페이지의 책을, 때로는 수십 년의 방대한 브랜드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야 한다.
이토이 시게사토는 일본인의 뇌리에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단단히 새긴 인물이다. 그를 다른 직업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책을 좋아하는 이에겐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산문집을 낸 작가로, 음악을 좋아하는 이에겐 류이치 사카모토가 소속된 YMO의 작사가로, 게임을 좋아하는 이에겐 <마더>의 기획자로 말이다. 그래도 그는 버블 시대를 호령했던 카피라이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세계 기업 순위 20위 안의 절반 이상이 일본 기업이었고, 5위권 역시 모두 일본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규모의 스포츠 이벤트였던 F1에 수많은 일본 기업이 스폰서로 이름을 올렸다. 일본의 만화 잡지 『주간 소년 점프』도 스폰서로 활동했는데, F1 스폰서로 잡지사라니. 당시 화려했던 일본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버블 시대, 카피라이팅은 분명한 수요를 지닌 분야였다. 경제적 낙관과 소비지상주의가 팽배했기에, 광고업계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기업은 막대한 광고 예산을 TV 광고와 지면광고에 투자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브래드 피트, 스티비 원더 등 유명한 외국 배우와 가수가 일본 광고에 출연했으며, 더불어 카피라이터의 시대가 열렸다. 좋은 문장 한 줄이 소비로 이어지는 시대, 이토이는 두각을 드러냈다.
모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문장의 아름다움이 한국에 퍼지기엔 언어적 장벽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토이는 한국에 드문드문 알려졌는데,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속 카피라이터로 활동한 이력 덕분이다. 물론 그의 카피가 한국 포스터에 얹히지 않았지만, 원문의 카피가 바이럴 되었다.
<이웃집 토토로>, “이 이상한 생물은 아직 일본에 있습니다, 아마도”
<붉은 돼지>, “멋지게 산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모노노케 히메>, “살아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너구리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스튜디오 지브리와의 인연으로, 이토이는 <이웃집 토토로>에서 주인공 아버지의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환상 세계를 압축한 그의 문장보다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아니 유혹하는 그의 발칙한 광고 카피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의 문장은 삶과 가까울 때 더 빛난다.
<WELDGIN>, "이 점퍼의 멋짐을 모르다니, 아버지,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다!"
이 문장으로 이토이는 ‘도쿄 라이터스 클럽 신인상’을 수상하며 카피라이터의 길에 들어선다. 해당 광고는 잡지 『Men’s Club』에 게재된 패션 브랜드 <WELDGIN>의 시리즈 광고 중 하나다. 이 카피의 앞에는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서술된다. 아버지가 머리를 조금 다듬으라고 하자, 아들은 효도하는 마음으로 알겠다고 답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동시에 아들의 점퍼를 ‘걸레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버리라고 훈계한다. 아들은 괜한 반항심으로 속으로 아버지를 멋을 모르는 불쌍한 양반으로 치부한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긴장 관계를 발칙하게 드러낸다. 모든 아들을 대변하듯 그 심리를 솔직하게 작성한 동시에, 젊은이들만 아는 멋이 있다는 점을 유쾌하게 드러낸다.
<세이부 백화점>, “맛있는 생활”
“달기만 하면 싫증 납니다. 맵고, 쓰고, 시고, 떫은맛이 다양한 생활. 묻고 싶은 것은 맛입니다. 몸도 마음도 스스로 녹을 듯한 맛,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깊은 맛, 독특한 특징이 있는 신기한 맛, 맛이 없는 것은 질색입니다. 자기 나름의 맛을 찾아가는 여행은 그 자체가 자신의 생활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맛있는 사람과 만나고, 맛있는 책을 읽고, 맛있는 패션을 찾아 맛있는 시간을 보내는 그런 생활을 단지 이상에 그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세이부 백화점도 더욱 먹보가 될 작정을 한 1982년입니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일본의 전통 의상을 입고 ‘맛있는 생활’이라고 적힌 족자를 들고 있다. ‘맛있는 생활’이라는 메인 카피는 오늘날 조금 심심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참신한 표현이었다. 평범한 두 단어의 조합은 반향을 일으켰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생활에 매몰된 이들에게 한 단계 넘어 각자의 기호와 취향 아래 다양한 삶을 꾸려보라는 신선한 제안이었던 것. 메인 카피는 일본 광고 60년 사를 빛낸 카피 1위로 선정되었는데, 메인 카피보다 꽤 직설적인 바디 카피가 더 매력적이다. 특히 ‘먹보’라는 표현이 참 재밌다.
<신초샤>, 100권의 여름 도서 행사 슬로건
"만약 당신이 그 책 100권을 모두 읽는다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나팔꽃과 백 페이지. 매미와 50페이지. 개구리 울음소리와 백 페이지.”
“푸른 하늘은 역사상 가장 큰 독서등이다.”
"우리가 유년기를 멈춘 여름.”
“주먹으로 읽어라. 가슴으로 읽어라.”
매년 여름, 출판사 신초샤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등 여름에 읽기 좋은 도서 100권을 추천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토이에겐 100권의 책에 해당하는 100개의 카피를 작성하는 꽤 버거운 작업이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뜯어보면 애독자를 자극하는 낭만 있는 문장들이다. 특히 왜 여름에 읽는 것이 그토록 좋은지 소상히 유혹하는데, 문장을 마주하면 땡볕 아래 책을 펼치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당장에라도 책 한 권을 구매할 것만 같다.
일본식 카피가 익숙해진 지금, 이토이의 문장이 주는 감동이 조금은 식은 듯 보인다. 그러나 일상 단어를 낯설고 새롭게 조합한 그의 문장은 여전히 우리의 목덜미를 탁 친다. 당시 그는 일본 카피라이터의 위상도 끌어올렸는데, 기업조차 제품을 홍보하는 직관적인 카피가 아닌 소비자의 삶과 연결되는 간결하고 창의적인 카피를 요청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친근한 그의 카피 스타일은 지금까지 이어져 일본의 독창적인 카피 신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토이의 카피는 화려한 수식어 없이 마음을 꿰뚫는다. 그의 문장은 문장가의 펜이 아닌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와 표현으로 구성된다. 그는 "멋진 말을 쓰려고 하면 실패한다. 가장 평범한 말로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이 최고의 카피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표현에 심취하면 전하고자 하는 본질을 가리게 된다. 그는 내가 어떤 문장을 썼는가 보다 상대에게 어떻게 문장이 전달됐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이토이의 카피는 솔직하다. 솔직하면서 거칠기보다 다정하다.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논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입니다."라는 그의 주장처럼, 그의 문장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산토리 레드>를 위한 카피 “로맨틱하고 싶다”는 맛보다 분위기에 취하고 싶은 이들의 욕망을, <미놀타 X-7 카메라>를 위한 카피 “지금 당신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네요”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록하고 싶은 본능을 드러낸다. 그의 솔직함은 반전 포스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편의점 앞에서 음료를 마시는 고등학생을 등장시키고, “어쨌든 죽는 건 짜증 나는 일이야.”라는 카피를 얹는다. 전쟁에 나가기 싫은 어린 학생의 원초적인 반응, 그리고 그를 향한 보편적인 동정심을 낱낱이 건드린다. 카피라이터를 창작자가 아닌 발견자로 표현한 그는 사소한 일상을 관찰하며 진실을 찾아낸다.
그의 무기는 솔직함이었기에, 말을 건네는 듯한 문체, 혼잣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솔직함이라는 무기를 더 날카롭게 다듬었다. 또한 그는 진실만 남겨두고 덜어내고 덜어냈다. 떠올려보면 우리가 내뱉는 일상의 문장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맛있으면 맛있다, 멋있으면 멋지다. 미사여구를 덜어낸 그의 문장은 더 진솔하게 다가온다.
이토이의 꾸밈없는 문장은 사람들의 뇌리와 가슴에 박히며 시대를 호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카피의 시대는 저물었다. “오랫동안 그런 일을 해왔지만, 그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죠.”라며 그는 시대의 변화를 업계를 떠나게 된 주된 이유로 설명한다.
카피라이팅은 분명 새로운 유행이었고, 기업과 대중은 이에 열광했다. 그러나 버블 시대가 끝난 이후,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재치 있는 카피는 여력을 다한다. 카피뿐만 아니라 광고의 역할도 많이 축소됐는데, 창의적인 광고를 제작하기보다 물건의 가격을 대폭 낮추는 것이 정답으로 여겨졌다. 더 이상 이토이의 문장은 소비의 계기가 되지 않았고, 그의 문장에 감동하기엔 세상은 각박해졌다.
그는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하루 50만 명 이상이 접속하는 웹사이트 호보니치 이토이 신문을 운영하는 데 매진한다. 그는 문장을 작성하는 일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마치 가수가 라디오에서 노래하는 것과 텔레비전에서 노래하는 것의 차이와 같아요. 어느 상황에서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는 무대를 옮겨 광고 지면이 아닌 블로그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문장을 전한다.
“어느 날, (베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지루해질 때까지, 잠시 이걸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저 ‘부럽다’ 정도의 일을 두고 ‘치사하다’라고 말하는 건, 이제 그만두자.”
“세상이 끝장났다는 느낌은 SNS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꽤 옅어진다.”
“고독은 애초에 전제 아닌가요.”
때때로 간솔한 마음을 뒤로하고, 멋진 단어를 끌어 오고 싶을 때가 있다. 복잡한 미사여구는 진실을 감춘다. 갖은 관형어와 부사를 덧붙인 내 문장이 유독 못나 보인다. 그럴 때면 이토이의 문장을 훑는다. 참된 마음 그리고 뒤따라 번역된 단어. 문자 한 줄, 전화 한 통, 글 한 줄이라도, 솔직해질 때 그 문장은 조금이나마 마음으로 향하지 않을까. 진솔한 마음이 여실히 뿜어 나오는 거리 위 문장을 모아보았다. 아름다운 문장들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