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토끼가 발맞추던 곳

by 정아

어렸을 적 우리 동네는 지도에 없었다고 했다. 신작로를 가운데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졌는데 아랫마을은 금강의 갯벌을 매워서 마을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랫마을 할아버지 집에 살았었다. 우리 동네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전기가 들어왔고, 그해부터는 밤에 호롱 불을 켜지 않고 환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선생님은 나를 보고 토끼가 발맞추는 곳에서 사는 애가 시내로 진출했다며 놀려댔다. 그때는 시골에서 진학한 학생들이 고등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거나 자취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나자마자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다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기억만 났다. 고향에 내려오게 된 이유가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황당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할아버지 말씀을 잘 들으셨는지 무척 서운했다. 우리를 위해서 고향에 다시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나중에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내가 그때 할아버지 말만 듣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 너희들에게 제일 미안했다”라고 얘기하셨다.


아버지는 맏이로 태어났다. 결혼 후에 자식들을 낳아 기르면서 시골에서 사는 것이 자식들 교육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엄마와 자식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큰아들이 못마땅해서 매번 같은 얘기로 아버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큰아들이 고향을 지켜야지 어디 타지에서 살고 있어”라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화를 내기 일쑤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고향에 한 번 다녀가면 불편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년을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할아버지의 설득과 호통하는 별의별 일을 다 참아내며 서울 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엄마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살자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 의견에 따라서 자식들을 끓어 안고 다시 9남매의 맏며느리 역할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아낙네로 돌아왔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어서 안 일이지만 그때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착한 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 유년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엄마는 서울에서 살았던 얘기를 해주셨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나의 기억은 국민학교 입학식 날부터가 시작이었다. 국민학교 입학식 날 나는 엄마 손이 아닌 삼촌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입학식에 오는 아이라는 것은 왼쪽 가슴에 달린 하얀 손수건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옷핀으로 야무지게 꽂아주신 어머니는 내 손을 삼촌 손에 쥐여주고 입학식을 보내셨다. 9남매의 맏며느리는 그랬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는 시골 동네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시간 내서 같이 가자고 했고 휴가를 내고 아버지와 시골 우리 동네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는 예전보다 많이 변해있었고 멋진 집들이 지어져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서 자녀들한테 갔거나, 건강이 나빠져서 돌아가신 분도 있었고, 요양원에 들어가신 분들이 많았다. 세월의 흔적은 마을에 남아있는 어른들 모습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지도에 없던 우리 동네 아랫마을은 지금은 지도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