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시는 학창 시절의 마음 안정제였어.
올 한 해가 벌써 8개월이 흘러 가을 문턱에 바싹 다가왔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밤 기온은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려 찬 기온이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여미게 만들었다. 남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지 목청껏 울어대던 매미소리는 이제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면 계단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시끄러운 매미소리를 대신 채워주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나뭇잎은 벌써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끝내고 한쪽 끝부터 색색 깔을 섞어내며 각자 선택한 색깔로 머리를 디밀어 빼꼼 고개를 내밀어 자기만의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늦은 장맛비 속에 떨어지던 나뭇잎은 멀찍이 한 잎 두 잎 노란색, 주황 색깔이 보였다. 마음 급한 녀석들이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뽐내려고 서둘러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올해 들어 시작한 시 필사는 처음 21일간의 짧은 여정을 마무리했고, 이어서 한 달 두 달 꾸준히 진행됐다. 알지 못했던 시를 찾아 읽고 마음에 드는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으며 다시 생각하고 되뇌게 됐다. 시를 읽으며 봄이 왔다가 여름이 왔고, 어느새 가을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두 계절을 보내고 세 번째 계절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읽고 필사를 했던 시가 몇 십 편에 달했다. 처음 시집을 샀던 것은 필사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시를 읽다 보니 어느새 나의 학창 시절 모습으로 빠져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좋아했던 내용은 그때 당시 유행처럼 여학생들 사이에서 적어놓고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그 내용은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던 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한 구절이었다. 다음으로 좋아했던 건 함석헌 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였다. 힘들고 지친 우리에게 정말 그런 사람 한 명 옆에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충분했다고 우리는 친구에게 “네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니?”라며 강제로 ‘그런 사람’이기를 종용했다. 그 시절의 친구는 ‘그런 사람’이라 믿고 가슴에 고이 새겨두었다. 친구가 있어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 시가 있어 마음을 키울 수 있었다.
사춘기를 보내느라 감정 소모를 많이 했던 중학교 시절에는 고등학교 진학을, 그다음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느라 성적과 진학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우리는 하루하루 표정이 없어졌고. 감정은 삭막해져 정서적으로 피폐해져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0교시’부터 시작해서 야간자율학습까지 의무적으로 마쳐야 했고, 막차를 놓치면 집에 갈 수 없는 친구들은 한밤중에 깜깜한 산길을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학교가 산속에 있어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오는 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9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시간대를 맞춰 줄지어 나와야만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굴러가는 나뭇잎을 보고도 뭐가 그리 우습던지 고개가 뒤로 넘어가 목젖이 다 보이도록 웃어대도 멈춰지지 않았다. 서로에게 속 보이면서도 부끄럽지 않았던 그 시절에 위안 삼아 들려주던 구절이기에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때의 읽고 나눴던 글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났다.
며칠 전 윗동네에 사는 친구 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전주에 내려오는데 전주에서 얼굴을 보고 싶다고, 시간 되면 같이 만나자고 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친구가 보고 싶어서 나는 현자에게 주소를 물어 저장하고 내비게이션에 길 안내를 맡긴 채 무작정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탔다. 현자는 연락을 받고 내가 올라간다는 소식을 온 동네에 알렸다. 덕분에 시간이 되는 윗동네 친구들이 서너 명 현자네 집에 모여 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만나서 차를 마시고 수다를 한참이나 떨었다. 시간은 어쩜 그리도 빨리 흘러가는지 붙잡지 못함을 아쉬워만 해야 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뒤 다음을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는 길은 서로의 마음을 알았던지 몰랐던지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지나고 꼭 2년 만의 재회의 기회였다. 코로나로 인해 타지역 방문이 강제는 아니더라도 제한적이고 코로나 선별검사를 해야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지침이 있어서 선뜻 그러마 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현자는 너무나도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수긍하며 우리는 또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긍정적이고 다각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인지 매사에 ‘이것도 맞고 그것도 맞아’라고 해서 친구들은 ‘넌 뭐가 그렇게 항상 다 맞냐’라며 핀잔을 듣기도 했다.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둘 다 맞아’라고 하는 현자는 양쪽 친구들의 이야기를 너무도 잘 들어주었고 속상한 마음을 잘 다독여 줘서 특유의 성격이 잘 발휘되었다. 그런 현자에게는 항상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지금도 현자는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가 정말 많았다. 현자에게 물어보면 소식을 모르는 애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소식통이었다.
한때는 시를 읊조리며 필사를 했고. 라디오에 편지를 보내고 에세이를 들고 다니며 읽었던 문학소녀였다. 20대 꽃다운 나이에는 명동과 종로, 강남을 주름잡던 언니들이었다. 6명의 친구들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결혼과 육아 이야기를 공유했다. 정신없이 20년을 보내면서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과 여유 있게 여행을 가자던 우리였다. 어린아이를 낳아 키우고 고3을 지내면서 집을 비우는 것이 어려웠던 우리는 친구들 자녀 중 제일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지만 그 약속은 지금까지 유효했다.
꿈이 많고 고민도 많았던 그 시절 친구가 있어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 시가 있어 마음을 키울 수 있었다. 오늘의 우리는 그 덕분에 지금의 건강한 중년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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