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라는 핑계라도 붙여가며 찾아뵈었어야 했다.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발걸음을 이번에도 미루고 있었다. 핑계를 대보면 목에 염증이 생겨 몸에 열이 나고 온몸이 아픈 몸살증세가 있었다.
목이 잘 헐고 붓는 나는 병원에 가지 않고 약국에서 목감기 약으로 대신했다. 열이 나면 무조건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하는 것도 병원에 가지 않은 이유라면 이유였다. 콧속 깊숙이 면봉으로 후비는 느낌은 구역질을 동반하여 1~2초 사이에 헛구역질을 몇 번이나 하게 했던 기억에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변명을 덧붙이자면 시어머니 사시는 동네에 어버이날을 앞둔 이틀 사이에 코로나 확진자가 12명이나 생겼다며 절대 오지 말라고 두 번이나 전화해서 당부하셨다. 나에게 정당한 핑계가 생긴 샘이었다. 시아버지에게 가지 않은 아쉬움은 손녀가 준비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는 카네이션을 보니 더욱 커졌다.
“점심 먹고 아버지 뵈러 갔다 올까요?”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사를 읽고 있던 남편에게 나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남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오늘 가지 않으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점심으로 면을 삶아 멸치육수에 볶은 김치를 넣고 달래장을 만들어 국수를 말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아버지한테 다녀오자”라고 했다. 가는 길 내내 휴대폰 재생목록에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날씨와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추모의집 가는 길 비는 내리고...
음악을 듣다 보니 비가 거세게 내리는 도로를 달려 어느새 추모의집에 도착했다.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한 잔을 뽑아 안으로 들어갔다. 믹스커피를 앞에 두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우리는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유난히 믹스커피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심근경색으로 진단받은 후에는 믹스커피를 드시지 못했다. 믹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시어머니의 단속에 걸려 잔소리를 들으셨다. 시아버지는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그 후론 거의 드시지 못했다. 가끔 남편이 시댁에 가면 주방에서 자기가 먹을 거라며 믹스커피를 타곤 했다. 아버지를 드리려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시어머니도 나도 모른척했다.
제일 좋아하는 믹스커피 한 잔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갈 때마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에 시어머니에게 무심히 말씀하셨다.
“지난번에 애들 오면 준다고 한 거 있잖어”
“애미야, 손녀딸 주려고 뭐 사놓던 것 같던데 엄마한테 물어 봐라”
“너희 어머니 고추장 담아 놓더라”
어머니께서 깜빡하시고 챙겨주지 않으실라 치면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시어머니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기억해내고 하는 말씀이다. 항상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라며, 둘도 없는 손녀라며 무심한 듯 세심하게 신경썼다.
시아버지는 3년 전에 소화가 안 된다며 새벽에 물을 마시러 주방에 나갔다가 넘어졌다. 자식들 걱정할까봐 병원에 안 간다고 버티는 걸 남편이 겨우 병원으로 모셨다. 어렵게 모시고 가서 진찰을 받으신 후 한 달 반 동안 병원에 계셨다.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추모의집을 나와 걷는 길가에 있던 토끼풀이랑 노랗게 피어있던 민들레가 반가웠다. 길게 뻗어있던 길목이 왠지 친근했다. 비가 와서 물안개가 피어있는 도로의 풍경조차 달라 보였다.
추모의집 앞 길가에 피어 있는 토끼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드라이브 삼아 멀리 돌아서 집으로 오기로 했다. 지나는 길에 작고 예쁜 빵집을 겸한 커피숍이 있었다. 커피숍에 잠깐 들러서 커피와 빵을 사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할아버지 세 분이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할 말이 있으셨다보다. 저렇게 친구 분들과 담소도 나누고 식사도 하시면서 지내고 계시는 모습이 언제였던지 생각나게 했다. 순간 가슴이 멍했다.
아버지를 뵙고 오는 내내 비가 계속 쏟아졌다. 시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셨던 사랑에 고마움과 행복함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유난히 믹스커피의 향기가 그리움으로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