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20년이 넘게 다녀왔던 우리만의 특별한 여름휴가를 코로나로 인해 작년과 올해에는 가질 못했다. 해마다 7월이면 우리 친정 가족들은 펜션으로 모였다. 휴가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을 남동생 네가 다하고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보내줬다. 펜션을 골라서 예약하고 장 보기를 해서 고기를 재오거나 반찬거리를 미리 사서 만들어왔다. 착한 올케는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서 그 많은 일들을 조용히 해냈다. 준비가 다 된 상차림에 그냥 몸만 가기가 미안한 마음에 과일이나 간식거리, 혹은 조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사람들마다 먹을거리로 양손이 무거웠다.
낮부터 한 집 두 집 도착해서 저녁이 되면 모두가 다 모이게 됐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안에서는 야채를 씻고 수박을 잘라서 준비를 했다. 밖에서는 남자들이 숯불에 고기를 굽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와 버섯, 바나나를 맛있게 구워냈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세상 가장 맛있는 숯불구이 바비큐 파티가 시작됐다.
밖에서 고기 파티를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서 배가 부르면 하나둘씩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뒷정리는 역시 남자들 몫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 앉아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오래 묵은 수다를 떨었다. 할 이야기 너무도 많았다. 수다를 떨다 보면 그렇게 많이 먹었던 고기는 이미 소화된 지 오래였다. 누구랄 것도 없이 다시 다과 준비를 시작했다.
"또 먹어? 그게 어디로 들어가?"
"다 소화돼서 이제 출출해요. 들어갈 데가 다 있지요."
“이런 데 오면 먹는 재미 아니야? 맛있는 거 먹고 밤새 수다도 떨고 그런 거야”
그런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보내며 너스레를 한차례 떨고 나서 계속해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디로 들어 가냐?'라며 핀잔을 줬던 남자들과 아이들도 슬금슬금 옆에 와 있었다. 다시 또 한 상이 차려졌고 밤늦은 시간까지 2차가 계속됐다. 남자들이 둘러앉아 술을 한 잔씩 기울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미역국을 끓이고, 내일 아침에 먹을 반찬거리를 준비했다. 그렇게 다음 날 파티 준비를 끝낸 후 우리도 간단하게 맥주 한 잔씩 마셨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생일상을 차려야 하기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불이 꺼진 후에도 ‘하하 호호’ 거리느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 일찍 일어난 사람이 먼저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반찬을 담아내서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깨워서 말끔하게 씻기고 나면 아버지 앞의 상 가운데로 커다란 생일 케이크가 놓였다. 아이들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연습시킨 올케는 애들에게 먼저 선창하도록 했다. 아이들 목소리에 섞어 우리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손뼉을 치면서 한 명씩 따라 불렀다. 아버지께서 촛불을 '후' 불어서 끄고 나면 모두 큰소리로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라고 외쳤다. 아버지는 매년 하는 행사 같은 특별한 여름휴가와 생일파티를 좋아하셨다. 지식들을 모두 볼 수 있어 좋으셨고, 손자, 손녀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그 또한 제일 좋아하셨다.
"고맙다. 고맙다."
생일케이크 모두가 함께 '호' 불어서 같이 불을 껐습니다.
매년 아버지는 감동하셨고 '고맙다'라는 말로 답변했다. 아침 일찍 아내가 차려준 생일상을 받아 맛있는 아침을 드시고, 낮에는 동네 사람들과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한상차림으로 생일파티를 했었지만 그건 벌써 26년 전의 일이었다. 엄마가 해 줄 수 없는 생일상을 26년째 딸이, 며느리가 대신했다. 아버지는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져서 회상이 잘 안된다고 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잊혀지는 것 또한 너무 아쉬워서 예전 이야기를 할 때면 눈물을 흘렸다.
생일상은 밥 한그릇과 국 한사발이면 충분합니다.
아침 생일상을 치우고 나서 우리는 짐을 챙겨 물놀이를 하기 위해 점심을 예약해 둔 곳으로 향했다. 점심까지 먹고 나면 이젠 진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각자 집으로 향해서 위로, 아래로 길을 따라 흩어졌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출발하면서 한껏 굽어져서 쓸쓸한 어깨를 한 뒷모습을 보이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먼 곳을 바라봤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고 뚝딱거리는 소란스러움이 사라지니 조용한 적막이 흐르는 것 같다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창 밖을 내다보셨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생일파티를 위해 준비했던 펜션을 예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우리에게 특별했던 여름휴가와 아버지의 생신 파티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순번을 정하듯이 돌아가면 아버지를 방문해야만 했고, 서울로 경기도로 곧바로 돌아갔다. 타지에서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불편하고 오래 머무르는 것조차 아버지에게 폐가 될까 봐 조심스럽기만 했다. 서로의 안부를 전화로만 확인하고 잘 가라는 인사를 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친정에 갈 때마다 약한 소리를 했다. 얼마 전 음식을 준비해서 들렀을 때 하신 말씀이다.
"언제 다 모이는 걸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젠 너희들 얼굴을 못 볼 수도 있겠다 싶다. 너희들 남매가 다 모였던 것이 벌써 몇 년 전이라 얼굴을 잊어버려서 기억도 안 난다. 나 살아생전에 다들 모일 수나 있을는지."
자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살짝 내비쳤다. 이젠 정말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는 것이 눈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가족은 해마다 7월에 맞이했던 특별한 휴가를 잃어버렸다. 나의 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에게 특별했던 여름휴가를 보내게 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 아버지의 건강이 허락해 주길 바란다. 내년에는 꼭 2년 전의 그때처럼 아버지를 모시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준비한 생일상에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큰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