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을 생각한다.
올해 가을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린다. 그날도 오전 내내 비가 내렸고 퇴근 시각에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다른 일은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장거리 시외 노선버스가 길을 잘 못 들어, 퇴근하고 집에 도착한 시각이 평소 대비 40분가량 늦어진 일 외에는.
하루의 모든 일들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퇴근시간이 되어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언제나 타는 그 장소에서 그 시각에 그 노선버스를 탔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목적지 IC에 다 와서 진출하려고 했으나 정체가 심하여 조금 더 달려 다음 IC로 진출하였다. 가끔 그런 식으로 정체를 피하곤 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 길로 조금 더 가서 유턴하면 제 노선대로 갈 수 있다. 거리는 조금 멀어도 시간은 절약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좀 이상하다.
알고 보니 버스가 길을 잘 못 들어 반대방향 고속도로로 진입하게 되었다.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운전기사가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승객을 가득 태운 시외 노선버스가 길을 잘 못 들다니, 그것도 고속도로를 반대방향으로 진입하다니.
이쯤 되면 해명, 사과 방송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객들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퇴근길이라서 관대한 것일까? 차내는 너무도 조용했다. 주변 사람들을 슬쩍 보니 핸드폰으로 내비게이션을 켜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어찌어찌 돌고 돌아 정상 노선으로 돌아왔다. 40분 정도 늦어졌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뭐야? 그러다가 운전기사가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 운전자인가? 말은 못 하고 얼마나 미안할까? 그래도 항의는 해야 하지 않나?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승객들은 어찌 이렇게 조용하게 참고 있을 수 있지?
내릴 때 뭐라고 한 마디 해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 회사에 얘기를 해야 할까?
내 잃어버린 40분은 어디서 보상받나?
이런 전례가 있기나 한 걸까?
강경한 생각과 온건한 생각이 교차하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그냥 내렸다.
운전기사는 승객들이 내릴 때 등 뒤에다 대고 미안하다고 했다.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렸다는 사실은 버스가 이미 가 버린 후에야 알았다.
공교롭게도 탈 때는 비가 왔는데 내릴 때는 안 왔다.
작년 여름에 같은 노선의 버스에 놓고 내렸다가 1주일쯤 후에 극적으로 찾은 바로 그 우산이다.
쓰던 우산 하나 잃어버린 것은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깜빡 잊은 것이 문제다.
게다가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해 두었었다. 도착 예상 시각 5분 전에 울리도록 해 두었고 그 시각에 알람이 울렸었다. 그러나 그때는 버스가 길을 잘 못 들어 고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였고 알람에 대한 의미가 없는 시각이라 경황 중에 그냥 꺼버렸다.
혹시 다른 더 중요한 일도 깜빡하고 잊으면 어쩌나, 이것이 더 큰 문제다. 건망증에 대한 대비 자체를 잊은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어찌하랴. 이상하게 별 일 아닌데 그날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이렇게 글로 정리해 두는 것이 그날 일을 잊는 방법도 될 것 같아서 써서 보관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