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태주 님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긴다. 나도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얼핏 들어서다. 그러나 언감생심, 채 한 페이지도 지나기 전에 나 자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감히 어딜 견주려 드느냐 하는 말이 행간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쉽게 읽고 쉽게 잊어버리는 선데이서울 가십 기사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매력이 있어서 좋다.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이런 감성 에세이를 읽는 내가 어쩐지 좀 낯설어 보인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점차 글에 빠져드는 나를 보며 계절의 신비스러운 영향력과 나이가 들어감을 함께 느낀다.
어느 블로거님이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다."
우연히 본 이 말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줄 긋기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한다.
줄 긋기는 인간의 오랜 습벽이다. 별들을 가만두지 못하고 줄을 그어 별자리를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신화를 지어낸다. 그뿐인가. 이 개념과 저 개념에 줄을 그어 없던 학문을 만들어내고 진보를 거듭한다. 전 지구인을 ‘랜선’으로 연결해 새로운 국경,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낸다. 인생이란 어떤 사람에게 선을 잇고 어떤 언어에 줄을 그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말들 중에 내가 밑줄을 그은 말들이 나의 언어가 된다. 이 책 안에 쓸모 있는 문장들이 있어서 단 몇 줄이라도 그대의 것이 된다면, 나는 메밀꽃처럼 환히 흐드러지겠다.
별자리가 나오고 학문이 나오고 인간관계에서의 선이 나오고 언어가 나오고 급기야 랜선까지 나오는 이런 독자를 위한 설명글을 읽고서 어찌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말로 사랑을 시작하고, 말로 서약하고, 말을 전할 아이를 낳고, 말의 세계로 아이를 내보낸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전승해 자신의 말을 만들고 그 말을 지키며 산다. 말의 주인이 죽은 뒤에도 말은 살아서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삶의 방향이 된다. 얼마나 유장하고 위대한 생명체인가, 당신과 나의 말들은.
이런 글을 읽으면 책을 펼친 채 고개를 들어 멍하니 위를 올려다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다가 서서히 고개를 숙여 책을 바라본다. 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책멍이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 글이 읽힌다. 마술 같다. 하기야 매 장마다 다 이런 글들로 가득 차 있으니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병아리가 되어 버린다.
거짓말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한 번 보자.
엄마가 말하는 "응, 괜찮아." 거짓말이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돈이 뭐가 중요해?" 진짜 거짓말이다.
"내가 그 사람을 좀 아는데 말이야." 경계해야 할 사람의 거짓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매우 위험한 거짓말이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이건 슬픈 거짓말이다.
"사랑해. "
"자~ㄹ 한다."
"엄마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죽고 나면 죽은 자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영원히 지켜주겠다는 말도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도, 죽고 나면 거짓이 된다. 확인받을 게 있다면, 그것이 특히 사랑이라면 미루지 말고 당장 확인받아야 한다. 어떠한 진심도 소용없게 된다. 영원은 슬픈 거짓말이니까.
사랑은 수시로 확인되어야 한다.
봄이 벚나무에 간지럼을 태워 꽃 사태를 일으키듯이
낯간지럽고 화끈거리는 말들이 사랑의 온도를 올린다.
가장 정확한 마음은 당신이 하는 고백으로 확인된다.
오늘 내 기분은 가을 가을 하다. 이런 표현은 도대체 어느 광산에서 캐낸 보석일까?
“오늘 기분이 어때요?”
이렇게 물어봐 주는 사람이 나는 좋다. ‘당신의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바람이 담긴 말로 들린다. 당신이 내 기분을 물어봐 준다면 나도 당신의 기분을 살피고 당신과 충분히 교감할 준비가 돼 있다.
오늘 내 기분은 가을 가을 해요. 당신은요? 당신의 기분도 설탕단풍나무 같기를 바라요. 오후 세 시의 숲에 메이플 시럽이 가득 고이고 있어요. 늦가을 해가 당신 곁에 길게 머물기를 바라요. 저 설탕 같은 햇살이 당신의 바스락대는 기분에 듬뿍 발라졌으면 해요.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무수히 많지만 꼭 기억하고 싶은 것들, 조금 더 옮겨와 본다.
인류는 직립을 통해 말을 얻었다. 네발로 걷는 동물은 소리를 내는 기관인 폐와 후두와 인두와 구강의 연결이 지면과 수평하게 돼 있다. 직립은 90도로 꺾인 척추와 머리뼈를 위로 펴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혁신이다. 수직 자세 덕분에 후두가 아래로 내려오고, 울림통 역할을 하는 인두가 공명하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우뚝 섬으로써 울부짖음이 아니라 다양한 음성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돈 버는 기술이나 말 잘하는 요령 따위를 알려주는 책들이 대세인 시대에 나 같은 에세이 작가들은 난감하다. 소설은 흥미라도 있고 스토리라도 있는데, 에세이는 그야말로 잡다하고 사변적이다. 뼈다귀는 없고 살은 너무 많다. 에세이 작가는 해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서 뼈를 드러내는 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답으로 고정된 세계를 해체하고, 정답이 없는 인생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람들이라 뼈를 드러낸 글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프랑스 작가 아네스 드 레스트라드가 쓴 『낱말 공장 나라』라는 아주 짧은 동화책이 있다. 이 나라에서는 말을 하려면 가게에서 낱말을 사서 삼켜야 한다. 자주 쓰는 좋은 낱말은 비싸고 필요 없는 낱말들은 값이 싸다. 부잣집 아이가 한 소녀에게 고백을 한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어른이 되면 우린 결혼할 거라고. 가진 낱말이 많아 완벽한 문장으로 말한다. 그런데 부잣집 아이 말고 소녀를 좋아하는 가난한 집 아이도 있었다. 아이가 가진 낱말은 세 개뿐이다. 그것도 공중에 떠다니는 낱말을 곤충채집망으로 붙잡은 것이었다. 아이는 소녀에게 가서 자기가 가진 전부를 말한다. “체리, 먼지, 의자.” 문장이 되지 못한 불완전한 낱말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녀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보았으므로. 소녀는 아이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적을수록 더 좋다는 말. 불완전해도 그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것. 말의 식탐을 조금씩 덜어내고 비워낸다면 분명해지고 투명하게 보일 것이다. 너에게로 이어진 마음의 직통로며 심장이 쿵쿵 건너가는 소리까지도.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시대, 플랫폼 시대, 메타버스와 비트코인이 대세인 시대, 전기차와 자율주행차가 나오고 하늘을 나는 도심 교통수단이 나오고 로봇이 인간을 대체해도 에세이는 살아남을 것이다. 아니 꼭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