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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Sep 29. 2020

일이 그리는 삶의 궤적

<스틸 라이프>를 보고 생각한 것

“어차피 장례식이란 건,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거예요.”
“이상한 직업이네요. 나 같으면 못해요.”


<스틸 라이프>의 주인공 존 메이의 직업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위 대사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연고가 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공무원 존 메이의 직업은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그저 정적인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일을 정적인 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틀에 박힌 업무 너머의 삶을 발견한다. 그는 죽은 자의 흔적을 밟고, 죽은 자의 삶을 재구성해 아무도 오지 않을 장례식에서 읽힐 추도문을 작성한다. 죽은 자의 삶의 궤적을 좇고, 흐려진 궤적에 다시 생명력을 부여하는 그는 누구보다 동적인 존재였던 셈이다.

그는 당시에는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좇으며, 그 역시 뚜렷한 삶의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는 걸. 영화의 엔딩은 반복적인 하루를 살며 그가 남겼던 삶의 궤적은 결국 그의 삶의 지향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장은 정적인 삶처럼 보일지 몰라도, 거시적인 눈으로 보면 결국 특정한 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 그것이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삶의 방식일 것이다.


일을 대하는 방식은 개인의 삶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이상적으로는 일이 자아실현의 도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조건이 들어맞는 일을 구하기란 어려울뿐더러 어떤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한 가치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 상황에서, 개인은 자신이 일을 수행하는 방식을 조정하며 자아와 일 사이의 부조화를 최소화하고자 한다.


일의 종류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은 일하는 행위에 자신의 가치를 투영한다. 기계적인 일을 하건, 정적인 일을 하건 간에, 실천적인 일의 방식은 개인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누군가는 <스틸 라이프>의 존 메이처럼 능동적으로 일 너머를 상상할 수도,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가치를 일의 종류로써 매길 수도 있다.


자아와 일 사이의 부조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일에 맞추어 변형시키지를 않기를 바란다. 나는 곧 일이 되고, 나는 나의 직업으로써만 설명되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란다. 나를 대변하는 한 가지가 나의 직업이 된다는 것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똑같이 정적인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실현하는 존 메이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직업의 타이틀만으로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없다. 나는 내 직업이 자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직업을 도구로써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과는 아주 정반대의 일을 하더라도, 나는 나일 것이다. 나는 내가 바랐던 일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일을 하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내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방식의 일을 하건, 어떤 성격의 하루를 살건 간에, 나는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믿을 것이다. 


정적인 일도, 정적인 삶도 여전히 삶이다.


Stil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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