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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Jun 11. 2021

호캉스라는 자발적인 고립

현재를 살기 위한 행위, 호캉스

나는 호텔이 좋다.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거나, 철저히 혼자가 된다거나,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진탕 술을 마셔야 된다거나 하는 것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며 결국은 그것을 하고야 만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p.55


나도 살아가면서 당장이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일들이 몇 개 있다. 예를 들면 곧 증거도 없이 휘발되어 어렴풋한 기억으로나마 남게 될 부질없는 일에 큰돈을 쓴다던가. 혼자 호텔을 가는 행위도 그렇다. 평소에도 혼자 있지만, 더욱 철저히 혼자가 되기 위해 돈을 쓰는 일.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철저히 고립되고 단절되기 위해 돈을 쓰는 일. 참 웃긴 일이다. 타의로 고립되고 혼자가 되는 일은 괴롭고 외롭고 슬프기만 한데,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자발적으로 갖는 고립은 다소 낭만적인 인상을 주는 '고독'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나에게 자발적인 고독은 생명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하다. 호텔 방을 여는 순간 이 세상에 나와 15만 원만 존재한다는 느낌이 주는 짜릿한 해방감. 방 안의 공기가 돈으로만 꽉 찬 느낌. 내가 초마다 내뱉고 마시는 숨이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되는 일.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공중분해될 부질없고 덧없는 경험을 위해 돈을 쓰는 일은 정말 보람차다. 내가 이런 일을 위해 노동을 감수했구나, 싶은 위안이 든다.


호텔에 들어서면 사회에서 가졌던 복잡한 정체성이 투숙객1이라는 한낱 하루만 유지될 신분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호텔에 가는 행위는 새로운 하루짜리 정체성을 부여받는 일이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었는지 따위는 뒤로 하고 진정한 '아무나'가 되는 일은 항상 신난다. '기억이 소거된 호텔방'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면 지워질 시한부 정체성은 나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무도 모르는 사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건 참 편안하다. 내가 가진 것과 잃은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틀이 벗겨지고 배경이 지워진 익명의 개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오로지 투숙객이라는 역할만 기대되는 공간에서는 내일이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일만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하루짜리 투숙객이 되면 하루가 오롯이 내 것이 된다. 현재를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고, 시간은 나의 영향력 안에 놓이게 되어 나는 하루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한다. 내가 낭비하고 싶으면 낭비하고, 내가 만끽하고 싶으면 만끽할 수 있다. 후의 이벤트를 위해 기다리는 시간도 아니고,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시간도 아니다.


미래를 위해 살고, 과거에 얽매여 살다가 현재만을 오롯이 살아가는 일은 그래서 더 짜릿하고 재밌다. 잃어버렸던 삶의 주체성을 하루짜리 통제력으로 보상받는 곳이 바로 호텔방인 셈이다.


고립되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고립되어야만 현재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고립 속에서야 비로소 나를 둘러싼 것들을 보게 된다. 고립되어야 비로소 방 안의 것들이 오롯이 내 것이 되고, 내 시간도, 내 생각도 내 통제력 하에 놓인다.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누구도 현재를 위해 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찾는 자발적인 고립. 누구도 가져가지 않았던 내 삶을 되찾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인 느낌을 일시적으로나마 만끽하는 일. 그래서 나에게는 혼자 가는 호캉스가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주기적으로 꼭 필요한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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